보다 성숙한 개인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길
대학에 처음 입학해서 내가 가입한 동아리는 ‘자유교양’이라는 이름의 철학 세미나 동아리였다. 담배 연기 매캐한 동아리 방에서 선배들은 기타를 튕기며 헤겔과 마르크스를 논했다. 선배가 던져준 변증법 철학 입문 책을 열심히 읽으며 세미나 준비를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나는 별 생각 없던 고등학생에서 사회주의자로 변신해 20대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오랜 기간 대학생 (치과대학과 사범대학 재학), 전문직 공무원 (공중보건의사), 성당의 주일학교 교사 등으로 그 시절을 보내기도 했기 때문에 그다지 세상의 쓴 맛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내게 ‘학생’ 아니면 ‘선생님’으로 불렀고 모질게 대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즉 사회의 현실, 인간의 실제 본성을 그다지 겪어볼 기회가 없었다.
물론 내가 사회주의와 같은 집단주의 철학에서 벗어나 개인주의 철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세상의 쓴 맛을 경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마도 일련의 내가 읽은 책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책들 중에는 사범대 4학년 때 공통사회 과목으로 임용시험을 볼까 잠시 생각하던 중 읽게 된 책인 멘큐(Gregory Mankiw)의 경제학 교과서(Principles of Economics)가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나에게 멘큐의 책처럼 직접적이진 않았지만 개인이라는 주제에 눈뜨게 만들어준 계기가 된 책이 있었다. 치대를 졸업하고 섬 보건지소에서 치과 공중보건의사로 일하면서 마을 노인정에 있던 작은 도서장에서 만났던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의 <권리를 위한 투쟁(The Struggle for Law)>이 그것이었다.
초라한 도서장의 책들 중에 '토마토 농사법’ 옆에 꽂혀 있던 그 자그마한 책이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개인주의라는 새로운 철학으로 내 인생의 항로를 전환하게 되는 나중의 내 인생을 암시하는 작은 하나의 복선이었다. 20대 내내 사회주의 세계관에 젖어 살면서도 권리라는 개념에 대해 한 번도 치열하게 인식해 본적 없었던 나는 그 책을 읽고 이 세상과 나의 관계에 대해 동화 속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동화 속에서 걸어 나왔다고 해서 세상과 부딪히고 반목하며 살기 시작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럴 뻔도 했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그 결과로 초래될 극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이기고 살아갈 만한 위인은 못되었다.
오히려 점점 사회 생활을 하는 동안 갈등을 피하는 요령이 늘어나서 어느 샌가 타협과 양보의 미덕은 지금 내 삶의 가장 중요한 태도 원칙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개인주의적 소신은 점점 지금껏 더 굳어지고 확실해져 온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개인주의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있는가를 반문하는 사람들은 흔히,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그 일을 원할지 원하지 않을지는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개인주의자가 된 것 역시 그렇다.
나 자신에 대해서뿐 아니라 내가 보는 인간은 모두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이분법(dichotomy)적으로 보지 않는다. 특히 그러한 도식을 가지고 인간을 개인주의자나 집단주의자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위험한 접근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처럼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문제에 대해 따로 철학적으로 고민하며 그에 맞추어 자신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그래서 심지어 자신을 개인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제 사회 속에서는 거의 만나기 힘들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두 성향을 자신 안에 함께 가지며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물론 그렇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의 사회는 전체적으로 보다 개인주의적인 혹은 보다 집단주의적인 특성을 보일 순 있다.
하지만 나의 첫 책 이래로 꾸준히 내가 생각하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개념은 인간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유전과 사회적 영향으로 형성되는 성향 (disposition)과 그러한 성향을 바탕으로 개인 혹은 사회가 선택하는 다양한 전략들(strategies)의 특성이 나타난 모습이다. 단지 인간이 진화해서 지금까지 생존해 오는 과정에서 생물학적으로 보다 더 강하게 인간성 안에 자리 잡게 된것은 집단주의였고, 인간의 역사(history) 시대 이래로 점차 인간성 안에 들어와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개인주의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어떤 인간 집단이든, 정치체제든 원래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대결적인 행동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반쯤 미친 독재자와 소시오패스들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데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겠지만, 근대 이래 인간의 역사에서 힘없는 개인들을 진정으로 무지막지하게 도륙했던 건 언제나 다수 대중의 지지, 묵인, 세뇌, 선동 등을 바탕으로 한 권력 집단이었지 그저 혼자 광기 부리는 망나니들이 아니었다.
어렵고도 천천히 개인주의가 성장해 나간 역사는 역으로 그만큼 인간의 역사에서 집단주의가 공고했음을 증명한다. 특히 서양 중세 크리스트교나 동아시아의 유학 사상이 보여준 역사처럼 결국 집단주의 사상은 그 사상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시간이 가면서 점점 인간을 옭아매는 공통성을 가졌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왜 일까?
집단주의적 인간의 본성이 동물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잘 분석해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긴 인류의 진화 동안 인간은 동물적 본성을 간직해왔다. 지금도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유사점이 많이 발견된다. 그루밍 (grooming)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영장류들의 그루밍 패턴을 분석한 연구는 많다.
중요한 것은 인간 사회 안에서도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양태를 분석해보면 사실상의 언어적 그루밍 (verbal grooming), 즉 이성적 사유에 기반한 대화가 아닌 그저 상호간의 감정적 유대를 위한 논리 없는 말의 교환에 지나지 않는 행동에 많은 시간과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이성적 측면에서 볼 때 비논리적인) 일상의 대화들이 실제 사회 속 인간관계에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 같은 행위를 통해 개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다 원활히 유지, 도모해 나가게 된다.
동물의 모습과 이렇게 흡사한 집단주의적 인간사회 속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인류의 역사에서 ‘생각하는 개인’들에 의해 숱하게 시도되었다. 하지만, 늘 그 생각하는 개인들을 우상화하는 집단주의적 인간 사회의 속성으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 그 개인들의 생각 자체가 대중을 옭아매는 보이지 않는 철창이 되어왔다. 어떤 하나의 생각이 도그마가 되어 버리는 사회는 그 생각 자체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시키는 감옥의 역할을 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 이 사고의 감옥을 꽤 즐긴다는 사실이다. 특히 개인이 미분화(未分化)된 사회에선 그 새장의 창살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하는 위험한 새들은 처단받게 되는데, 이는 그 새들의 공동체가 가진 자기보존 본능이라기 보다는 그 새장 안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소수의 지식인 집단과 정부에 의한 세뇌와 선동 기재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흑백 논리로 좋다 나쁘다 구분하는 것은 마치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로 논쟁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사회 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모두 각자의 행복을 평화롭고 현명하게 추구해 나가기 위해 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문제에 보다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이 아마도 내가 개인주의 철학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단순히 이 단어가 지칭하는 개인이냐 집단이냐의 차원이 아닌, 훨씬 더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이는 시장과 권력의 작동방식의 차이와 관련되며, 이성과 감성의 기능의 차이와도 관련된다.
개인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모든 개인이 자신의 정신적 기쁨, 행복,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인정한다. 이 사상의 바탕에는 모든 개인이 그 전에 각자가 서로 다른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상대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시각이 깔려 있다.
나에게 정신적으로 행복을 주는 가치가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 나와 타인이 서로 행복을 각자 추구해 나가자는 사상인 것이다. 개인 간의 가치의 확인 및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본질로 하는 시장이 개인주의의 사회적 실험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개인주의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반개인주의자들은 이러한 개인주의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인간 관계를 온통 경쟁으로 몰아넣는다는 해묵은 비판에 계속 의존한다. 당연히 내가 관심을 가지는 시장의 본질과 시장의 기능에 대해서도 그들은 무관심하거나 아예 시장의 존재 자체를 증오하기도 한다.
현대의 반개인주의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맑시즘적, 사회주의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20대의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함’을 주장한 마르크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가 정답이다.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결과가 충분히 가치 있다면 노동 소외가 자신에게 발생해도 그냥 살아가는 노동자는 얼마든지 많다. 그리고 그들을 혼 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문학가나 예술가도 자신의 문학, 자신의 예술로부터 소외되기도 한다. 그깟 나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보다 더 소중하게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면야 뭐가 대수이겠는가?
‘인간은 모두 다르다’를 받아들이는 순간 맑시즘도, 집단주의도 모두 의미를 상실한다. 서양 중세의 카톨릭이나 조선의 성리학이 맞이했던 운명도 결국 그런 이유로 많은 인간에게 불행을 안겨다 주었고 그리고 교조적인 모습을 띠고 점차 추락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왜 쉽지 않았을까? 아니, 지금도 왜 쉽지 않은걸까?
이는 주변 세계를 연합과 분리의 과정으로 인지하는 인간의 행동, 그리고 감성과 이성의 대뇌 활동에 기반하여 주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특성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인간의 행동과 특성 중 연합(association)과 감성(emotion)은 ‘인간이 모두 다르지 않다’ 혹은 ‘나와 닮았다’라는 인식과 관계가 깊다. 실제로 인간은 서로 많이 닮았다. 거리의 비둘기들의 눈, 코, 입을 보면 모두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어쨌든 우리가 모두 다른 선호(priority)와 성향(taste)과 목적(goal)을 가진다는 것을 이성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감성적으로는 쉽게 무시하곤 한다.
반면 개인주의는 집단 감성에 맞서서 이성을 중시하고 원칙을 고수하도록 인간과 사회를 고취시킨다. 이는 개인주의 자체가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개인주의적 전략으로 행위하게 되는 인간이 시장의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의미이다.
맑시즘은 가진자가 못가진자를 지배하고 수탈한다는 시각으로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를 바라보지만, 이는 단기간에 겉으로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인간은 시장에서 자신이 선택을 받는 경험을 축적하면서 오히려 조심스러워지고 겸허해진다. 자신도 실수나 판단착오로 얼마든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될 수 있음을 학습하기 때문이다.
즉, 경쟁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적 시각은 인간과 사회를 종적인 시각이 아닌, 횡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시장의 진화 및 인간이 조건과 시스템에 반응하며 메우고 변화해나가는 존재라는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 한 마디로 반개인주의자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자유경쟁은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하지만 집단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고립되어 홀로 존재하는 개인은 무력하고 불안정하며 의심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그 개인이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 속에 자립하고자 애쓰는 눈물겹도록 힘겨운 과정, 더 나아가 시장의 경쟁 속에서 보다 나은 가치를 향한, 더 나은 자신(better self)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도덕적인 모습 따위는 집단주의자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이들 집단주의자들의 시각에는 제국주의나 자본주의에 착취당하고 억압 받는 노동자 집단 혹은 민중의 고통 만이 실재할 뿐이다. 인간은 고통 속에 살아간다는 기본적인 철학적 인식이 없이 (모든 인간이 소외되지 않고 불평등의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명제에 사로잡혀 모순투성이인 인간의 본성도,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개인주의가 보다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다원주의의 눈으로, 그리고 상대적인 시각으로 인간 자신의 모순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안의 집요한 강박성을 내려놓고 그러한 모순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도덕과 법치는 바로 그러한 시각을 전제로 삼고 출발선으로 삼아야 인간을 구속하지 않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피할 수 있게 된다. 개인주의는 결국 군중 속에 홀로 선 인간 자신을 대면하는 모습이다.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 기고 글
기사입력 2021-03-08 12:02:09
해당 기사 링크 (온라인):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24965
해당 기사 1 (지면, 3월 5일): http://www.skyedaily.com/data/skyn_pdf/2021/20210305/web/viewer2.html?file=20210305-31.pdf
해당 기사 2 (지면, 3월 8일): http://www.skyedaily.com/data/skyn_pdf/2021/20210308/web/viewer2.html?file=20210308-30.pdf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