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31 작성
어제 입시 설명회를 보면서 든 생각 (고등학교 교육의 공정성과 수시제도에 관하여)
After watching a private instructor's college entrance presentation
어제 우리 학교 강당에서 한 유명하다는 입시지도 강사가 초대되어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갔다. 강연이 끝나고 강당을 나서는 학부모들의 얼굴은 기분좋은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고 희망에 찬 긍정의 기운도 느껴졌다. 마치 부흥회가 막 끝나고 은혜로 충만한 마음으로 교회를 나서는 신자들의 모습과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설명회를 맨 뒤 자리에서 지켜보면서 들었던 착잡한 생각을 여기서 술회하고자 한다.
한국인에겐 fairness에 대한 감수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이는 평소에도 많이 봐온 것이지만, 어제 그 설명회 연자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리고 그 이야기에 기분 좋아하는 많은 학부모들을 보면서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는 내신 성적보다 훨씬 높은 성적대의 대학교에 들어간 사례들, 주로 틈새를 공략했던 경우를 들으며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가 그 반대의 경우를 경험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수시 입시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미래사회는 과거 사회와 다르므로 주입식 교육과 성적 위주의 평가는 지양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나는 묻고 싶다. 미래사회는 과연 과거 사회와 다른 종류의 인재를 필요로 하는 사회일까. 여전히 사회에서 그리고 시장의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상은 성실히 탐구하는 인간형이다. 과거나 미래나 지성과 도덕 교육의 지향점은 사실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회적 인간상은 타인을 존중할 줄 알며 자신의 인생과 선택에 책임을 지는 책임감 있는 인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자유시장경제 사회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함에도 경쟁을 혐오하는 한국사회에서는 경쟁에 가장 기본 전제인 공정함에 대한 의식이 많이 결핍되어 있다.
수시제도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고등학교 교육이 학생들을 더 높은 대학에 보내기 위한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완결적인 교육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는 자기완결적인 교육기관이 아니다. 많은 교사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입시학원 강사와 경쟁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의 일이 입시학원 강사와 어떻게 본질적으로 다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고 독려하며 성적이 왜 그 모양이냐고 핀잔 주는 교사들은 자신의 직업이 어떤 전문직업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관념이 부재하다.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교사는 정말 공정하게 학생을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어제 입시 설명회의 강사가 계속 학부모들에게 ‘담임 선생님을 믿고 선생님이 권유하는 대로 수시원서를 쓰도록’ 설명하는 모습에 내가 불편함을 느끼게 된 이유이다. 고등학교 교사는 학생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임무가 아니라 자신의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온전한 교육행위의 수행이 임무여야 한다. 담임의 임무가 자신 반의 학생을 다른 반보다, 다른 학교보다 너 높은 대학에 많이 보내는 것이 된다면, 이는 이미 현행 수시 입시제도는 아무런 신뢰도도, 정당성도, 의미도 가질 수 없다. 결국,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수시는 그 취지와 목적이 가지는 비현실성으로 인해 온갖 위선과 불투명성만 키워놓았다.
구글이라고 해서, 그 무슨 IT 기업이라고 해서, 불성실하고 책임감 없고 타인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인간을 뽑으려 하는 기업은 없다. 그러한 파괴적인 인간을 뽑으면 자신의 회사가 망하는데 어느 회사가 그런 인간을 뽑겠는가. 설령 구글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에서 잘나가는 괴짜들, 가령 어느 하나에 꽃혀서 깊게 골몰하는 스타일은 남에게 폐 끼치고 책임감 없는 성격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 분야,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극한의 성실성과 지적 집중도를 발휘하는 인간형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인재상의 자질은 오히려 더 많은 지식의 축적과 더 철저한 자기 훈련 및 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자유롭고 창의적인 학교 수업을 받아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자유롭고 창의로운 수업 따위는 없는지도 모른다.
단순 흥미 위주 수업참여나 기출문제 풀이 등, 단기 기억 저장소를 넘나드는 일차원적 암기 수준을 넘어서 입체적 이해와 연합적 사고력의 학습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가장 기본이 되는 교과서의 정독을 통해 텍스트를 스스로 분석하고 머리 속에서 재구조화할 수 있는 형태의 공부가 요구된다. 그래서 나도 수업시간에 그런 역사 수업을 하고자 노력한다. 문제는 학생들이 감당하기 어려워 한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의 현실은, 평가 주기가 짧은 학교 내신 그리고 그 보다 더 짧은 과정 평가 (수행평가)들로 인해서 긴호흡의 깊은 사고를 수행하는 학습을 하기에 벅차다. 즉 수시 전형으로 좋은 대학을 가는 학생들은 교육부의 기대와 달리, 무슨 고차원적 사고 능력을 훈련하는 학습이 아니라 각 과목별로 주어진 수행평가의 활동들 그리고 중간 기말 고사 준비를 잘 계획 세워서 착실히 해내는 학생들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은 격려되고 조장되어야 하지만 직접적으로 그걸 키우는 수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노력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가지려는 인간의 고질적인 본성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그리고 타인과 잘 소통하고 협력하는 인성 역시도 그런 인성을 키우는 인성 훈련의 방식 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인간과 사회를 대하는 기본 태도와 인식에서 우러나온다. 자신이 성실하게 행동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기본 예의가 훈련되어 있으면 소통하고 협력하기 위한 기본 자질은 모두 갖춘 것이며 그 이상은 나의 손을 벗어나는 것이다. 무슨 더 잘 소통하고 더 잘 협력하는 것 따위는 없으며, 인간의 상호작용이 그렇듯 어떤 인성의 사람과 만나서 소통 혹은 협력하게 되는지의 상황변수가 보다 중요할 수 있다.
소통과 협력은 본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개념으로 타인을 조종하려는 악인들도 상황에 따라서는 전략적으로 이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소통을 잘한다. 협력을 잘한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당연히 모호하고 주관적이며, 상황과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집단 간의 힘의 대결의 결과로 그 판단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소통과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선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소외당하거나 공격당하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것을 경시하고 뭔가 미래사회에 대단한 새로운 역량이 필요하고 그걸 위해 교육방식이 바뀌어져야 한다고 선전하며 수시 제도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학교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거나 학습이라는 프로세스에 대해 진지하게 사고해보지 못한 사람들, 혹은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는 절차의 부작용에 눈감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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