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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Natural: as medical historian




In Enoshima, Japan


왜 자연인가 (Why does naturalism matter?)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영국에 유학 가기전엔 차를 몰았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만든 만화책의 제목과 같은 이름의 차였다.

나름의 로망을 실현했던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허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완벽한 뚜벅이족으로 변신했다.


나는 비누도 샴푸도 치약도 쓰지 않는다.

로숀도 자외선 크림도 아무것도 몸에 바르지 않는다.

딱히 화학제품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산지 한 7년 정도가 넘어가다 보니,

이 편한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특히 여행할 때는 너무 편하다.


하지만 여기선 나의 simple life에 대한 철학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고,

나의 naturalism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자 한다.

이 웹사이트에서 나는 내 삶의 방향을 simple, natural, moral로 잡았는데,

실제로 내가 두번째로 나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바로 자연(nature)이다.

그리고 나는 이 포스트에서 바로 그 자연과 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고자 한다.


서론이 길었는데,

내가 박사과정 동안 연구 주제도 바로 이 주제, 즉 자연과 인간의 몸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정확한 내 연구 주제는 사실 19세기 중후반 영국의 hygiene과 의학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지만, hygiene의 개념 자체가 19세기 내내 의학사적으로나 사회사적으로 볼 때 극히 복잡하고 현란하게 변화하고 있었던 터라, 그 개념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nature cure philosophy 혹은 healing power of nature 에 대한 19세기 관념을 내 연구 내용 속에 아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19세기 유럽에서 낭만주의(romanticism)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의철학의 요소 중 하나가 nature cures라는 관념인데, 이는 당시 사회적으로도 대중적인 큰 인기를 끌었다.

아직 의사 집단이 충분히 전문직화하지 않은 19세기 중반의 의료 시장 (the medical market)에서 각종 의학이론들이 각축을 벌이던 가운데, 그러한 자연주의적 경향성을 강하게 내보인 치료법 체계 중의 하나가 hydropathy 였고, 이는 기존의 주류 의학이 약에 과하게 의존하던 것과 비교하여 hygiene 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hygiene이란 건강을 유지해나가는데 필수적으로 여겨져 왔던 몸 외부의 요소들 (서양의학에서는 Galen이레로 이를 six non-naturals이라고 명명해왔었다)을 일컬었고, 공기, 음식과 음료, 수면과 운동, 배설 등을 망라하는 -동양의학으로 비유하자면- 養生 (양생)의 개념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실제로 hygiene은 19세기 말에 일본에서 衛生 (위생)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서양의학사에서 전통적으로 hygiene은 양생의 개념에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hydropathy의 경우 물(water), 즉 다양한 형태의 목욕(bathing)을 주된 치료 수단으로 하였지만, hydropathy 의사들 중에는 목욕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hygienic agents를 치료에 활요하였다.


나의 박사과정 논문내용의 핵심 인물인 Edward Wickstead Lane (1823-1889)의 경우가 그랬다.

그가 hygienic medicine이라는 이름을 걸고 새로운 의학이론을 제시했을 때 그 내용은 사실 획기적이거나 새로운 내용을 담았다기 보다는 전통적인 hygiene의 요소들, 특히 목욕 뿐 아니라 exercise in the fresh air와 같은 hygienic agents (혹은 natural agents)들을 강조하고, 거기에 철학적인 기반으로 nature cure philosophy(자연치유철학)을 활용하였다.

내가 Lane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19세기 후반의 영국 의사들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재미있었던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자연주의적 의학 관념을 medical reform의 주된 이슈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 만 하였다.

당시의 영국과 미국의 medical market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그런 보다 자연주의적 관념을 가진 의사들 (J. H. Warner의 표현을 빌자면 'nature-trusting doctors')은 자신들의 이론이 훨씬 진보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것이라 생각했고 경쟁관계에 있던 권위적 주류의학(orthodox medicine)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기사작위를 받았던 John Forbes (1787 - 1861)로 대표되는 그러한 자유주의 부류의 의사집단은, 애석하게도 19세기 말로 갈수록 점점 더 비주류로 전락하게 된다.

다름 아닌, hygiene 자체가 점차 holistic한 의미를 상실하고 reductionism을 강하게 띠게 되면서 나타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생리학(physics)과 병리학(pathology)은 그러한 의학의 시대변화(전체론적 성격이 사라지고 환원론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되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의학 분야였다.

또한 의료시장의 측면에서도 20세기초로 가게 되면, 더이상 이전의 다양한 의학이론들 간의 경쟁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세균 병리학을 필두로 하는 환원론적 의학 접근법이 독점화(monopolisation)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2019년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내가 볼 때, 그러한 의학사에서 19세기 후반 이래 의학사상을 장악해온 환원론적 시각의 극단에 함몰되어 있는 모습이다.

작년 늦여름 영국에서 귀국해서 가장 답답함을 느낀 점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내게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마치 더이상 '바람이 불지 않는 도시'였다.

물론 바람은 불긴 하지만, 사람들은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기지도 고마와 하지도 않는, 아니 귀찮아 하고 더나아가 두려워 하는 모습이었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겨울에는 히터를 연신 틀어대며 창문을 하루종일 닫아 걸고 살아가는 모습.

가을과 봄이 찾아와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교사도 학생도 부도도 아이들도 모두 문을 닫고, 창문을 닫고 열려고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내가 마주친 그러한 모습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사고의 경향성이 지극히 자연으로 부터 동떨어진 모습으로 비춰졌다.

건강 검진을 정부가 나서서 너무 오버하다시피 강조하는가 하면, 남녀노소 모두 사람들은 아프면 약을 먹어야 한다는 관념에 갇혀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내가 건강보험 의무가입을 시행하는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그렇게 prevention이 경시되고 examination, diagnosis, treatment 위주로 흐르는 보건 정책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다.


19세기 영국의학사에서 healthy way of life에 대한 추구는 전술한 자연주의 의철학의 핵심이었고 그러한 철학을 담은 holistic hygiene의 주된 내용이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한 삶의 방식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왜곡되어 있는 관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굳이 돈을 써야만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healthy way of life가 비싼 organic 음식들과 정체도 불분명한 온갖 종류의 trendy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고 상품화 되어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사실 가장 소중한 자연 바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서울의 공기는 더욱도 안좋아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편한 자가용을 운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정부도 지금까지 그래왔듯, 도로 위에 자동차들의 배기가스를 줄이기 위한 노력에 극히 소극적이다.

도로는 오히려 계속 넓어지고 있고 사람들은 천박한 중금주의적 사조에 물들어 자신이 모는 차종을 자신의 경제적 수준 혹은 사회적 지위와 연결시키는 모습들이다.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 속에 살고 있는 도시인들의 한심하고 서글픈 자화상인 것이다.

서울은 인간 중심의 도시가 아닌 자동차 중심의 도시라고 나는 감히 단정지어 말한다.


더 늦기 전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

식목일은 부활시켜야 하고, 아니 마음 같아선 식목주간을 새로 만들었으면 한다.

아스팔트의 길과 빌딩 숲 만이 존재하는 도시에 숲의 섬, 숲의 길을 새로이 만들어 나가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들은 자연을 되살리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말 가슴 한편이 먹먹하다.

서울을 Asia의 Soul 이라고 정부는 홍보해왔지만, 내가 볼 때 서울은 내가 아는 그 어떤 도시들 보다도 soulless 한 도시이다.

자연이 없는 데 그 안에 무슨 영혼과 휴식과 사색과 철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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