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set (May 2023)
지난 주에 극장에서 존 윅4를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존 윅 시리즈의 새로 나온 에피소드라 당연하게 챙겨본 것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영화 시장의 중독성 강한 시나리오와 영상미에 이끌려서 상품을 구매한 셈이다.
존 윅 영화는 그 자체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영화 속의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특징적인 모습은 존 윅 영화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최고회의’의 존재와 관계가 깊다. 그들은 자신의 결정에 따르는 비용(cost)을 지불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많은 경우 이는 자신의 목숨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뒤따르는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습, 즉 자신의 권리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인식하는 모습은 존 윅 영화의 등장 인물들이 가지는 최소한의 도덕성이자 개인주의적 철학을 보여주기도 한다. 존 윅 영화를 보며 많은 미국 사람들이 옛날 서부 영화를 떠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우리가 흔히 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비용이라는 개념이다. 나 자신의 권리는 흔히 다른 누구의 책임이 동반되어야 행사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나’의 권리는 ‘너’의 책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누리고 있는 편안함과 안락함은 다른 누군가가 성실하게 책임을 이행한 결과이다. 그 결과 나 역시도 타인의 권리를 보상해주기 위한 책임을 치러야 한다. 이것은 개인주의와 시장의 본질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힐링을 화두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 소위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불만 그리고 힐링에 대한 추구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은 단지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삶을 소박하게 원할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들은 상처받고 지쳐서 결국 힐링에 매달리고 있는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극심한 경쟁과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이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리에 대해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함을 망각한 데서 오는 결과일 뿐이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지금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전, 복지, 윤택한 삶은 우리 사회 속 누군가가, 혹은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들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결과인 것이지, 우리의 ‘천부 인권’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국가에 ‘요구’하는 (대부분은 우리가 이를 우리의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우리들의 불만 사항들은 대부분 우리 자신들이 (정확히는, 불만을 말하는 나자신이 아닌 우리 중에 다른 누군가가) 감내해야 하는 책임을 전제로 한다. 자신의 ‘선하고 정의로운’ 목적이 ‘조건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 어떤 아름다운 권리에도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는 것은 개인주의적 도덕 원리의 기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단지 21세기의 대한민국과 같은 윤택한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마치 고대사회의 귀족처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존재하는 것 같다. 아무도 당신의 권리를 실현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힐링이든 뭐든 피곤하고 힘든 나의 영혼을 위해 권리를 행사하고 싶다면, 똑같이 누군가의 삶의 향상을 위해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야 한다. 애초에 경쟁과 힐링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과 권리라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돈을 지불하고 사는 물건처럼, 정부 지원금을 받아 운영되는 소위 공공 영역의 여러 사회 시스템들도 결코 공짜가 아니다. 천문학적인 재정부채로 최근 미국이 디폴트를 선언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그런데 남아메리카의 일부 국가에선 말도 안 되는 인플레이션으로 많은 국민들이 디폴트를 고민하는 미국으로 도망치고 있다. 사실 미국도 인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해 뼈를 깎는 심정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해온 게 그나마 지금의 상황이다.
원래 평등한 사회 구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사회적 비용을 많이 지불해야 하는 구조이다. 완벽이 아닌 지금보다 더 평등한 사회구조, 더 확대된 복지 정책을 지향한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기회의 균등에 만족할 수 없고 결과의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는 구호는 사실상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시스템 자체의 ‘공정성’을 훼손하게 되는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기회의 균등에 최적화되어 있는 체계인 시장에 정부나 국가가 개입하여 결과의 평등을 보장해주고자 함으로써 발생하는 비용 중 가장 큰 비용은 바로 개인의 자유라는 비용일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이는 사적 자치라는, 개인의 가장 본질적인 권리를 크게든 적게든 희생시키게 된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윤택한 나라에서 태어나 경쟁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권리는 다시 말하지만 천부인권이 아니다. 귀족들의 권리에 아무 조건 없이 책임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던 중세 농노가 아닌 이상 당신은 이미 천부 인권을 누리고 있다. 그 다음은 개인으로서의 내 존재의 무게를 내가 견뎌내는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국 사회가 더 독특하게 경쟁이 치열한 사회라는 시각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더 높은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경쟁은 21세기 선진국 어디에나 존재한다. (집단주의적 감정이 초래하는) 타인과 자신의 비교를 즐기는 무의미한 경쟁이 아닌 이상, 그러한 가치경쟁은 더 나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Sunrise (May 2023)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 기고 글
기사입력 : 2023-05-19 10:10:14
해당 기사 링크 (온라인):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92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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