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1>
“교실 안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배민 교사 (서울 숭의여고)
발표자인 김철홍 교수의 발표 내용“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서 소개된 에피소드인 대학원 학생들이 개인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는 지적은 실제 중고등학교 교실에도 적용된다. 2007년 조승희 총기 난사 사건과 인헌고 사건, 세월호 사건 등의 다양한 예시가 발표 내용에 나오는데, 최근의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발표자가 이 법안에 대해 ‘개인의 사상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집단 독재의 한 표현’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이 법안에 숨어 있는 중요한 본질이기도 하다.
집단주의적 세계관과 인간관의 문제에 대해서도 잘 지적하고 있다. 집단주의적 시각에서는 개인은 사회적 구조물이기에 모든 개인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지난 30여년 간 한국 사회의 문화 저변에 나타난 하나의 특징적인 변화는 ‘내 탓이요’가 사라지고 복지가 허술하고 지원이 미덥지 못하고 사회가 불공정한, 한 마디로 사회가 ‘헬 조선’이기 때문에 모든 불행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하게 되었다.
물론 생물학과 유전학에서의 논쟁이 보여주듯, 개인은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거의 반반 받으며 성장, 발달하게 된다. 사회 속 개인의 생각과 행동도 개인이 속한 사회 집단의 영향을 제외하고는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과 그런 개인이 그러한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사고하려 해선 안 된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보다 자신의 자율성에 근거하도록 만들어 가려는 노력은 개인의 생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발표 내용에서 개인주의의 본질은 결국 개인이 자신의 운명의 주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개인주의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종교개혁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교회사를 통해서 정치철학사의 발전을 바라보는 중요한 시각이기도 하다. 즉 프로테스탄트라 불리우는 개신교도야 말로 근대적 자유주의 시민의 본질이며 이들은 서양 근대사의 정치 경제적 발전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시각이다. 또한 발표 내용에서 중요하게 밝히고 있는 것은 사적 소유 제도가 개인주의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으며,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진 사적 재산을 축적한 개인에 의해 자유 시장 경제가 –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더불어 –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에 대한 반개인주의적, 집단주의적 도전에 직면하여 개인주의는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확립된 것이 보여주듯 승리를 거두었음을 말하고 있다. 끝으로 인간의 욕망이 가진 어두운 면, 즉 역기능을 인식하면서도 금욕주의에 맞서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긍정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발표자의 결론, 개인주의 사상이 강조되는 교과서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발표 내용에 대해 토론자로서의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개인주의는 철학과 도덕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한다. 그 이전까지는 이기심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발표 내용에도 있듯이, 이기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이기심은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가지는 유전적 본질에 가깝다. 즉 이 이기심에 대해 선과 악을 대입해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이기적’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은 늘 이기적이었다. 아니, ‘늘’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같은 하나의 철학적, 정치경제적 행동 및 사고 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라는 용어 자체는 19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구 지배질서를 지지하는 반혁명주의자, 가톨릭 보수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 등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들먹이는 소수의 지식인들을 폄하하고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었다. 노골적으로 이기적인, 혹은 이기적인 인간의 본 모습을 부정하지 않으려 했고 욕망에 충실하고자 했던, 이 지식인들의 모습은 당시의 세속과 종교의 지도자들 뿐 아니라 일반 유럽인 대중의 눈에도 좋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용어가 생기자 그 이전까지 이미 존재해 왔던 관념이 실체를 갖추고 그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까이는 칸트에서 스피노자, 좀 더 멀리는 과학혁명과 종교개혁 시기에 관념과 인식의 굴레를 탈피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선구자들의 글과 말들이 소환되어 이 새로운 관념에 실체가 형성되어 갔다. 특히 19세기 당대의 공리(功利)주의의 영향, 사회학의 방법론적 영향, 경제학에서 한계 효용 이론의 영향 등을 통해 구체적인 정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해 나갔다. 이데올로기의 극심한 대립이 기승을 부리던 19세기에 이러한 일이 나타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철학적, 사회과학적 이론화 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재창조되어 나간 개인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이원론적 대립 구도를 상정하고 그 구도 속에서 개인에게 초점을 두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2차 대전 후 사회주의의 전세계적인 확산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토대로서 기능하였다. 학계(academia)의 전반적인 친사회주의적 경향 속에서 오스트리아 경제학파 등 소수의 학자들이 바로 이러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사상의 전면전에 나섰던 것이 20세기 후반, 80년대의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고전 자유주의 정신의 부활 작업이었다. 이른바 60, 70년대 신좌파, 그리고 여기에 대응한 80, 90년대 신자유주의 등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 본질은 결국 사회와 개인의 대립 구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즉 신좌파는 기존의 공산주의에 비해 개인의 의미를 강조하고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고전 자유주의에 비해 국가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각각 중간 지대로 좀 더 옮겨 와서 계속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쉽게 얘기하는 개인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며 개인과 사회,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이원론적인 한 극단에 위치한 핵심 개념이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가 그 나름의 철학과 도덕을 그 이론과 개념 속에 주장하고 있듯이, 개인주의 역시 자유주의의 핵심 개념으로서 그 안에 철학과 도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철학과 도덕의 측면에서 단연코 개인주의는 사회나 국가를 내세우는 집단주의적 철학에 비해 보다 윤리적이다. 왜냐하면 집단은 결코 지적일 수도, 도덕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개인만이 지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을 지향할 수 있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사회는 결국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회는 결국 그 사회 속의 개인들이 지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지 지적이고 도덕적인 사회라는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집단주의적 철학에 비교하여 개인주의가 가지는 이러한 철학적 윤리적 우위성은 그 개인주의의 세계관과 인간관에 토대한다. 사회나 국가를 내세우는 사회주의나 전체주의에서는 필연적으로 인간 개인이 가지는 복잡성을 간과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모순적이며 불완전하고 변덕스러운 존재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나 전체주의에서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참을 수 없어 한다. 그래서 게으르고 비협조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개인들을 위해 특별한 장소, 즉 정치범 혹은 사상범 수용소를 준비해 둔다.
반면 자유주의 사상의 토대를 구성하는 개인주의 철학은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불완전하며 변덕스러운 존재인데, 이는 사회적 규제로 강제로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욕망 덩어리인 인간들을 사회적 강제 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질 수 있는데, 대신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수용소 대신 시장이 존재한다. 게으른 사람은 시장에서 낙오하고, 비협조적인 사람은 시장에서 아무에게도 선택 받지 못하며,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시장 참가자들의 버림을 받는다. 물론 많은 현대 자유주의 국가들은 민주주의적 요소 (다수결을 핵심으로 함)를 함께 채택하고 있어서 시장의 경쟁을 여러 모로 규제하고 제어하는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시장은 욕망을 펼치고 충족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욕망을 가장 효과적으로 (피를 부르는 강제 없이도) 억제하고 제어할 수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파는 사치품을 거론하며 시장이 인간의 허영심과 욕망을 부추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를 사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부자나 빈자나 개인들은 모두 시장에서 자신이 사고자 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최대의 효용을 줄 수 있는 조합을 찾아내고자 노력하게 된다. 즉 개인은 시장에서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많은 효용을 얻을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이다. 아무리 욕망 덩어리인 인간이라도 이러한 시장의 교환과 계약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지키지 않는 경우 결국 시장에서 퇴출되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는 상거래법에 의해, 간접적으로는 시장의 선택 기제에 의해 그렇게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우리가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는 결국 그 본질이 우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그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음을 돈을 지불함으로써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은 나의 사적 재산의 일부로서 나의 능력과 노동, 인격, 사회적 상황 등이 총망라되어 형성된 결과를 반영한다. 이는 특히 나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노동시장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는 스포츠에서 야구 선수들이나 축구 선수들의 ‘몸값’처럼 개인의 불굴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가치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노동시장에서 개인의 가치는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 내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고 외쳐도 사람들이 그렇게 봐주지 않으면 나의 가치는 보잘 것 없게 된다.
즉 시장은 우리 인간을 객관화시켜서 인식하게 만들고 역지사지하게 만들며 친절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한 마디로 더 도덕적인 인간을 만든다.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사회주의 국가에서처럼 강제적이고 불공정하게 인식하게 하는 대신, 선택을 받지 못하는, 거절당하는 방식으로 인식하게 한다. 자연히 인간은 주변 사람으로부터 혹은 사회의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선택 받기 위해 더 노력하게 된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개인주의가 작동하는 사회 공간, 즉 시장에서 시간이 가면서 자연히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이다. 반면 집단주의가 작동하는 사회 공간, 가령 공무원 조직 등에서는 패거리 짓기나 인맥을 위한 줄타기 현상이 나타난다. 시장의 발달이 매우 부진했던 조선사회의 경우 바로 이러한 집단주의가 사회 전체적으로 작동함으로써 매관매직과 부정부패, 당파싸움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였다.
교육에서도 개인주의와 시장은 학생 개인이 보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성숙하는데 사실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가령 학력시장을 통해 학생은 자신이 욕망하는 목표, 가령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의 입학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보다 성숙하고 모범적인 생활태도를 보이고자 노력하게 된다. 물론 대학에 잘 가기 위해 공부하고 모범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인간은 원래 가식과 위선의 존재이다. 가식적이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은 인간이 어디에 있던가? 학력시장이 없다면 교실의 학생들은 가식적이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게 될까. 어쩌면 더 위선적이 되거나 혹은 아예 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시장이 없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하지만 인간은 가능한 한 똑같은 결과, 동일한 목표를 위해 손가락 하나라도 덜 움직이려는 놀라운 효율성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공무원 조직이든 회사 부서 안에서든 사람들은 똑같은 월급을 받는다면 가능한 다른 동료보다 (친한 동료를 위한 우애를 담아 희생하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덜 일하려고 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는 시장이 없는 노예노동의 비효율성과, 이를 교정하고자 한 Taylorism에서 과학적 과업관리, Hawthorne effect의 동기유발에서도 증명되었다. 학교에서도 학력시장이 사라지면 학생들은 앎의 기쁨, 지식 추구의 희열에 이끌려 순수하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절대로!!!
교실 붕괴는 다른 모든 이유보다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국가, 정부가 나서서 이 학력시장을 규제하고 왜곡하는 데에 있다. 학력시장을 좋지 않은 현상으로 보고, 시험을 비인간적인 제도로 보고, 자신의 학력(학습능력, 성취정도)을 입증하기 위한 학업 노력을 대신하여 다른 측면들에 보다 비중을 두는 방향으로 대학입시제도를 개정하도록 해온 결과 학생들은 한 마디로 공부 안 해도 되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물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학생들이 공부 안 해도 되는 자유를 누리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나서서 교실의 학생들에게 공부를 등한시해도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결국 열심히 노력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는 불공정한 결과를,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태만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결과를 선사한다. 그 결과 학생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른 차별과 학력격차를 더욱 더 벌리는 결과를 가져 온다.
또한 시장이 없는 빈 공간은 진공 상태로 남지 않는다. 그 자리엔 권력이 메우게 된다. 근대 서구 정치사에서 자유주의와 상대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민주주의였음을 생각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즉 정치 집단들이 서로 자신들이 국민 다수의 의사 (민의)를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권력 쟁탈전을 벌인다. 학력시장이 없는 학교에서는 바로 학교폭력이 그 자리를 메꾸게 되며, 자유로운 학력경쟁이 없는 교실에서는 힘이나 권위를 바탕으로 한 지시와 복종이 그 자리를 메꾼다. 학생들은 학력서열이 아닌, 권력서열이 등장하고 학생들은 정치적인 계산과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사가 강제로 학생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고 입시 전망을 가지고 겁주고, 입시 전략을 가지고 학생들의 학력경쟁에 개입하거나 거드는 행위를 긍정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과거의 교사들은 학력시장에 대한 마인드가 없이 단지 학생을 자식처럼 잘 돌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질을 하고 인격 모독성 자극을 통해 공부를 강제했다. 교사와 학생은 개인으로서의 인격성을 서로 존중하고, 교사는 보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으로서의 모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학생 역시 보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공간으로 학교가 거듭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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