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와 지금
2016년 후반 박근혜 탄핵 당시의 기억 때문일까.
요 며칠간 인터넷에서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시도와 관련한 많은 뉴스와 유튜브 영상들을 보았다.
나는 박 전대통령의 탄핵 사건은 한국의 정치를 후퇴시킨, 정확히 말하면 조선시대 환국 정치의 모습을 소환시킨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왕이 탕평의 주체 역할을 했던 조선 시대와 다른 점은, 민주주의 공화국이다보니 대통령이 오히려 사도세자처럼 정쟁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고, 양반 유생들이나 휘말린 당쟁에 시민들이 대거 휩쓸려 시멘트 거리로 나와 정치인들’과 함께’ 싸운 점일 것이다.
2016년 당시에도 나는 좌파와 우파가 각기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라는 별칭으로 거리에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며 몹시 안타까왔다.
당시 영국에 있던 나는 영국의 의회, 그리고 영국인들이 정치 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을 한국의 모습과 자연히 비교하게 되었다.
영국의 의회의 모습은 한국의 국회처럼 웅장한 회의장 속 반원형 청중 앞에 높은 단상에서 발언하는 구조가 아닌, 좁은 방에서 여당과 야당이 반대쪽에 앉아서 각각의 대표 (한 명은 수상, 다른 한명은 야당 대표)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평하게 같은 눈높이에서 노골적으로 싸우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열심히 싸운다. Prime Minister’s Questions (PMQs)가 이를 대표한다.
나는 많은 영국의 젊은이들(주로 내가 알던 대학원생들)이 의회에서 어린 아이처럼 떼를 지어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야유하고 비난하며 싸우는 여야 정치인들의 모습을 한심하게 말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하지만 내 눈에는 부러웠다.
왜냐하면 영국의 정치인들은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의 직업에 투철한 모습으로 비춰졌고, 싸우는 원칙을 잘 지켰으며, 내가 볼 때는 그 덕분으로 영국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대신 싸울 필요가 덜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국에서도 Brexit 관련한 사회적 논쟁에서는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피켓들고 집단으로 의사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는 – 아래에 한국과 관련해서도 얘기할 – 좌경화된 기성 주류 언론과 우파적인 시민 집단들의 시각차에서 비롯된 것이지 의회에서 의원들이 자신들의 직업 (말로 싸우는 것)을 태만히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한국의 정치 모습은, 특히 우파 정치인 집단에서 더더욱 나타나는 특징은, 충분히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박 전대통령 탄핵 당시 소위 깨시민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좌파 시민들은 촛불 집회라고 자신들이 부르는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 즉 국정 농단 척결, 적폐 세력 척결 등과 같은 정치적 구호를 거리에서 외쳤다. 시민들이 정치 투쟁에 먼저 나선 모습이었고, 이는 좌파 민주당에게 장차 정치적 기회를 가져다주게 되었던 87년 당시 한국의 정치 특성이 재현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기성주류 언론 뿐 아니라 심지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향해야 할 사법부까지도 이러한 좌파 레토릭에 함몰되어 편향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내, 우파 쪽 시민들도 거리로 나와서 정치적 구호를 외쳤다. 이는 한국의 우파 정당 및 정치인들이 너무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우파 정치인들 자신들도 언론에 선동되어 탄핵에 동참한 마당이었고, 거리로 나온 우파 시민들을 그들은 외면하고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
87년 체제 수립 이후 21세기에 와서 드러난 한국의 좌파와 우파의 현주소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때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영국과 한국에서 정치가 인식되는 차이를 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비교는 필수적이다.
영국과의 중요한 차이는, 많은 한국인들은 영미인들과 달리 정치를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 관념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많다는 점이다.
한국의 정치를 바라보는, 영국사를 전공하는 나의 시각은 한 마디로 – 민주화가 아닌 – 정쟁(Political dispute)을 핵심으로 한다. 한국의 조선시대사와 마찬가지로 한국 현대사 역시 정치사는 다름 아닌 정쟁의 역사였다. 80년대 군출신 대통령 시절의 정치와 대결하여 야당 민주당 쪽의 줄기찬 대의 명분은 군부 독재 타도 였다. 그리고 후자의 바램대로 이루어져 87년 체제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군부 독재 타도 ‘따위는’, 그리고 '민주화'라는 허울 좋은 구호는, 정치인 집단들과 정치 세력 집단들의 대의, 명분, 즉 레토릭일 뿐이었다.
그 본질은 정쟁, 즉 정치 세력 간의, 정치 집단 간의 권력 다툼이었다.
정치적, 역사적 선과 악을 사법부가 재판으로 규정하고 한번 규정된 정치사적 인식이 성역처럼 인식되는 이 나라의 기이한 모습은 바로 국민들이 정치를 조선시대 양반 유생들처럼 정사(옳고 그름)의 틀로 파악하는 오래된 고정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내가 보는 한국의 현대사 정치는 조선시대 붕당 정치의 연속이자, 박 전대통령 탄핵 이후로는 그 조선시대 붕당 정치가 후기에 와서 변질된 환국 정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그 붕당 정치의 최후 막장 드라마라 할 수 있는 19세기 세도정치로 21세기 한국 정치가 전락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기성 주류 언론은 (사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좌파 레토릭으로 무장된 정치 담론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우파 시민들의 시각과는 선명한 차이를 보인다. 87년 체제 수립 이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치적 담론에 있어 완전히 밀리는 우파에 비해 좌파는 기성 주류 언론을 장악한 상황이다.
조중동을 나는 우파적 정치 담론을 주도하는 미디어라고 보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시장주의적 성향을 전하는 경제 신문들처럼 그들이 경제적으로 공산주의적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민주당 좌파쪽을 비판하긴 하지만, 정치적으로 그들은 친사회주의적이고 친중적인 신문들이며 기회주의적 상업성을 추구하는 회색지대 언론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21세기 정치가 세도정치로까지 전락하지는 않을 것같은 실낱 같은 희망을 이번에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때, 즉 박 전대통령 탄핵 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소위 언론에서 얘기하는 20 30 세대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언론에서 얘기하지 않는 더 큰 주역이 있다.
바로 Google의 유튜브이다.
참고로 코비드 19 사태 당시 나는 정말 답답했었다. 박 전대통령 탄핵 때 만큼이나 답답했다.
기성 주류 언론은 환원론적 (reductionist)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한 감염의학 및 공중보건 정책을 지지하며 일방적으로 대중을 선동했다. 정부 정책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의 발언은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나는 몇몇 인터넷 미디어에 열심히 투고하며 코로나 바이러스는 독감 바이러스와, 감기 바이러스와 본질에 있어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당시 방역 정책은 무의미한 에너지 낭비, 돈 낭비에 불과하다는 나의 신념을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나의 발언은 광야에서의 외침으로 끝났다. 백신반대 의료인 연합회의 김상수 대표도, 경북대의 이덕희 교수도 그저 소외된 미디어 혹은 기성 언론의 구석진 코너에 자신들의 발언이 전해지는 것으로 머물러야 했다.
내가 코비드 19사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때 공중보건에 있어서 반정부 정책의 시각을 가진 시민들이 기성 주류 언론에 맞서 싸울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바이든 정부 시절, 아직 일론 머스크가 X를 세우기 이전, (미국의) 친 민주당 혹은 좌파 성향으로 기울어진 미국 미디어로부터 구글의 유튜브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PC 좌파 정치 소신을 자랑하는 주커버그의 페이스북 만큼은 아니었지만, 가령 코비드 19 사태 당시 유튜브는 미국 CDC의 정책에 반대하는 동영상을 대거 입막음(신고 들어오면 바로 폐쇄)시켰다. 내가 볼 때 이는 좌파 PC주의자들의 캔슬 컬쳐의 일환이었다.
미국이 그 정도니 한국에서 코비드 19 상황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코로나 전체주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윤 대통령 탄핵 시도 관련한 한국 사회의 모습에서 앞선 박 전대통령 탄핵 당시와 다른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유튜브에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미국 정치가 트럼프의 당선으로 정치 지형 자체가 변화했고, 일론 머스크로 대표되는 반 기성 주류 미디어 분위기의 확대 속에 전례 없이 – 유튜브가 코비드 19 때 했던 것과는 달리 – 기성 주류 언론과 반대되는 정치적 발언들이 (알고리즘을 통해) 매우 활발하게 전파되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의 민주당은 이미 일부 우파 유튜버들을 고소하고 구글을 대신해 입막음 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이는 20 30의 거부감만 더 키우고 있을 뿐이다.
보다 더 큰 변화는 박 전대통령 탄핵 당시에는 20 30 세대가 유튜브라는 웹사이트를 정치의 담론 공간 (public sphere of politics)로 인식하지 않았다. 당시는 거의 기성 주류 언론에 대항하는 것은 유튜브에 막 시작하는 우파 시사정치 전문가들 그리고 일베로 대표되는 아웃사이더 인터넷 공간이 전부였고, 답답하면 시멘트 바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때와 달리 지금은 20 30들이 유튜브 안에서 자유롭게 자신들의 신념을 영상으로 만들어 전하고 교환하고 서로 격려하고 자신의 신념을 확산시키고 있다.
물론 기성 주류 언론이 보기에 이러한 행동은 ‘태극기 세력’을 그들이 바라보는 시각처럼, 젊은 ‘극우파’ 세력 정도로 인식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때와 지금은 달라졌다.
현 대통령이 탄핵되고 안되고와 상관 없이 이러한 새로운 물결을 타고 현재의 20 30 세대는 좌파적 정치 레토릭으로 정치적 담론 공간을 독점해온 (특히 MBC나 JTBC, 한겨레, 경향신문 처럼 지극히 독선적인 좌파) 기성 주류 언론에 맞서 (미국의 공화당을 지지하는 우파 젊은이들처럼) 한국의 정치 지형도를 바꾸어 나갈 것이다.
지금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일본 사회도 민주당이 잠시 집권을 하고 삽질을 해서 정치 경제 사회 전분야를 말아 먹은 후 민주당에 다시 집권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친 사회주의, 친 공산주의적 정책을 본질로 하는 한국의 민주당 역시 삽질을 해서 이미 말아먹은 바 있다. 아래의 국가 채무 폭증, 화폐 가치 폭락은 FACT로 문재인 정권 시기의 삽질을 보여준다.
위 그래프가 보여주는 정도의 FACT는 문재인 정부가 가지고 있던 좌파 국정 철학이 초래한 '결과'들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 그 국정 철학이 본질적으로 가진 문제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장기적인 큰 파괴는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갈등을 부추기는 집단주의적, 사회주의적 정책의 기조 속에 개인의 책임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정신이 위축되고 권리만 남발하는 ‘진상’형 시민의 증가와, 그러한 저열화되는 시장의 수준 속에서 투자는 저하되고 소비만 인위적으로 유인되는 데서 오는 경제적 생산성 및 체력 고갈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사회적으로 고용인과 노동자, 남과 여를 포함한 전 사회 집단의 상호 갈등 및 신뢰저하로 인한 출산율과 취업율 하락의 극단적인 심화 현상은 덤이다.
맞다. 한국에는 (독선적인 좌파 레토릭으로 정치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민주당 및 좌파 정치 세력과 비교될 수 있는) 현재 제대로 된 우파 정치 집단이 없고 세력도 없고 정치인도 드물다.
(위 그래프가 보여주듯) 현 정권의 정책이 딱히 문제인 정부 시절의 실정을 뛰어 넘은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음도 사실이다. 실제로 나는 현재의 국민의 힘 정당, 특히 그 다수의 국회의원들을 민주당에 맞설 수 있는 지식과 도덕을 갖춘 정치세력 집단으로 그다지 인식하지 않는다.
보다 본질적으로, 독립적인 개인의 인격과 그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여기는 (서구 근대 철학적 의미의) 개인주의 정신도 박약하다.
하지만, 개인주의 우파 정신 및 보수와 전통의 가치를 젊은 20 30 세대들이 점차로 제대로 이해해 나간다면, 좌파 정치 레토릭에 너무 기울어 있는 (여기에는 기성 주류 언론 뿐 아니라 사법부도 포함) 현 한국의 정치 지형이 균형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먼 미래에는 언젠가 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025.01.18. 배민
*오늘 블로그 글의 모든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copy 하였음을 알립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