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욕망으로 시야는 편견에 치우치기 마련
개인·시대·사회적 한계에 따른 불완전성 자각해야
집단적 편가르기 벗어나 열린 마음으로 자유롭게
인간이 사고를 한다는 것은 보다 더 객관적인 진리를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쉽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객관적인 시각에 바탕을 둔다고 생각하지만, 엄밀하게 객관적인 생각이란 증명하기도 어렵고 특히 사회적인 측면에서 그런 객관성은 지향해야할 목표이지 특정 의견에 있어 주장할 수 있는 가치는 아니다. 인간은 편견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이 가진 끊임 없는 욕망에 의해 개인의 시야는 편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게 된다.
슬프지만 이는 인간 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가령 사람들은 공정한 사회를 꿈꾼다. 물론 이는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분명한 하나의 사회적 가치다. 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공정한 사회라는 말은 하나의 이상에 가까운 개념이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하게 된다. 실제 현실은 단순히 공정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불공정이 재생산, 증폭되는 측면이 있다. 많은 동물학자들은 침팬지를 동물 사회학의 주된 연구 실험 대상으로 삼아왔다. 침팬지와 인간은 실제로 여러 면에서 닮아 있기도 하다. 침팬지를 비롯한 영장류들은 그루밍 행위(서로의 털을 손질해주는 행위)를 통해 힘의 서열 관계를 강제하거나 받아 들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집단은 그런 관계에 순응해 나간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하지만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침팬지들도 누가 힘이 더 강하고 누가 더 힘이 더 약한가를 구분하며 침팬지 개인들의 행동은 그러한 권력 관계 속에서 일종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침팬지들이 이루는 하나의 집단은 인간이 이루는 하나의 조직,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와 많이 닮아 있다.
어떤 사회 조직이든 일만 하는 기능으로 운영되는 조직은 없다. 큰 기업이든 작은 기업이든, 공공분야든 사적 분야든 그 안에는 힘의 논리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실 이는 학창 시절부터 개인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 인식의 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은 외롭게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 상호 작용 속에는 시장에서처럼 서로 간의 만족을 위해 가진 것을 서로 교환하는 매매 등의 계약행위도 있지만, 힘의 관철을 통해 상호작용이 사실상 일방향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한 사회를 꿈꾼다.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고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어 주는 마음 따뜻한 사회. 어린이 소설이나 동화 속에서는 그러한 사회의 마음씨 좋은 어른들의 모습, 아이들의 모습이 따뜻한 분위기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 소설이나 동화를 읽으면서 모두들 이 사회가 서로서로 이해하고 도와주고 격려하는 사회가 되어나가리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개인들은 조직 생활이 어떤 것인지 그 현실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지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조직의 논리, 힘의 논리가 현실의 인간 세계 속에서 횡행하고 그 속에서 힘이 약한 구성원들, 지위가 낮은 구성원들은 많은 스트레스와 고난과 역경을 겪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인간을 기본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는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어린 시절 읽은 소설이나 동화 속 주인공처럼 그런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한 희망을 버리진 않는다. 단지 그 따뜻한 사회가 사실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성에 기인한다. 즉 자신의 세계관·사회관은 결코 중립적이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열하게 이러한 인식의 한계성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는, 스스로에 대해, 스스로가 가진 감정과 느낌에 대해, 지식과 생각에 대해 그것이 ‘옳은’ 감정이며 ‘올바른’ 생각이고 ‘마음 따뜻한’ 행동이라고 사실은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정치적으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지 못하다. 어느 누구나 그런 것처럼 이는 너무도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치우쳐 있고 얼마나 편견을 가진 존재인가를 자각하는 노력을 통해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용과 존중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즉 나 자신이 가진 객관적이지 못한 측면을 공격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고려하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행동은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내가 속한 조직에 스트레스를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세상에는 나의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아주 많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완전하길 꿈꾼다. 무엇이 진리이며 진실일까? 내가 가진 초라한 이성에 의거해서, 우리 인간은 이를 결코 알지 못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식이 내가 가진 한계성 뿐 아니라 시대적, 사회적 한계성에 기인한 불완전성에 의해 늘 제한 받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은 단지 그 시작일 뿐이다. 보다 더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들 상호 간의 이해의 폭과 깊이가 더 발전하는데 일조하길 바랄 수 있을 뿐이다.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집단적인 편가르기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이 오길 소망해본다.
위 글은 5월 17일 블로그 포스트 ('사고의 객관성에 관하여')를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 기고 글
기사입력 2022-06-16 09:30:41
해당 기사 링크 (온라인):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59301
해당 기사 (지면, 2022년 6월 16일): https://www.skyedaily.com/data/skyn_pdf/2022/20220616/web/viewer2.html?file=20220616-3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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