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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자와의 메일 교환

작성자 사진: BaeminteacherBaeminteacher


A plum tree in Yeoido, March 2022



작년에 코로나 '백신 안정성 확보를 위한 의료인 연합' (약칭 '의료인 연합') 단체에 가입해서 홈페이지에 내 글이 실리고 까페에 내가 글도 올리고 한 이래로 그 단체를 통해 나를 알게 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걔 중에는 그렇게 나를 알게 되어 내가 작년 겨울에 출간한 책 <개인주의와 시장의 본질>을 읽게 되기도 한 것 같다.


얼마 전 그렇게 나를 알고 내 책을 알게 된 사람, 즉 독자 중의 한 명으로부터 메일을 받고 답장을 하게 되었다. 그 분의 메일을 읽으며, 내가 모르는 많은 한국 사람들 중에는 그처럼 부나 명예와 관계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삶을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매체에 기고하는 글이나 출간하는 책에 내가 적는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도 어느 누구에게는 삶의 귀한 단서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서로 서로에게 이어져 있고 모두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 글과 내 생각과 내 삶에 진지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임해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부족한 저자에게 과분한 독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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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메일 (개인 식별 가능 정보는 000처리)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000 라는데서 근무하는 000라고합니다. 고마운 마음과 여쭙고 싶은 것도 있어서 이메일 드립니다.


먼저 제가 선생님을 알게된 것은 의료인연합 사이트를 통해서 였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코미디에 가까운 (선생님 표현에 따르자면, 감기 걸리지 않겠다고) 모습을 띄면서 늘 제 자신의 생각과 사회의 생각이 도저히 일치할 수 없다는 점에 답답했습니다. 이덕희 교수님의 글은 현 사태가 의학적으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배민 선생님은 개인주의를 억압하는 국가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해 귀중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선생님 말대로, 소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코로나19가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개인주의자들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될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000에서 중산층 집안에서 000년 태어났는데, 제 세대가 그렇듯 저희 아버지는 97년 금융위기때 실직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은 아니였고, 제 자신도 게임중독에 공부도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주변의 무시를 많이 받으면서 고통으로서의 삶의 근본적 속성에 대해 눈을 떴던 것 같습니다. 현재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결혼도 하고 잘 살고 있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한 000년도부터 안도감을 느끼며 산 기간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몇년 전에는 꽤 심한 000에 시달렸고, 000 의학 전문의로부터 약복용을 권유 받기도 했습니다. 불교에 대한 관심은 000과 함께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세계관은 도킨스 식의 진화론, 소설가 김영하의 염세주의, 반출생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불교는 말이 되는 (make sense)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다만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습니다. 김영식 (시골농부의 깨달음 수업), 강병균 (포항공대 교수)의 책에서 실마리를 얻었으나 완벽한 해답은 아니였습니다. 우연히 보게된 설지스님의 글에서 충격을 받았고, 바로 그분의 책을 부크크에서 전체 구입하고 네이버 블로그 글은 지금까지도 복기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주장하는 현성공안, 무력한 깨달음은 비로소 제가 대학교 000학년때부터 깊게 고민한 동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진화론적 통찰과 계합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선생님의 <개인주의와 시장의 본질>이 저에게 설지스님의 책과 같이 여러 진실을 계합하는 최종적인 깨달음을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동물들이 보여주는 생물학적인 선택과 시장에서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통찰은, 저의 세계관에 심대한 영향을 준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를 연상시켰습니다. 제가 파악한 선생님의 핵심적인 주장 중 하나는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며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집단주의는 다수의 욕망을 오히려 저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시장은 효과적으로 욕망(자유)를 보장하는 도구이다.’ 인데, 이는 설지스님이 계속적으로 지적하는 깨달음(성리학, 공산주의 포함)의 사회화의 실패의 원인과 정확히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책의 몇몇 구절에서 삶은 근본적으로 고통에 가깝다는 문장을 본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러한 고통과 태어날 아이가 자아감을 형성한 이후 자신이 ‘태어나지 않을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는 사실을 고려할때 반출생주의의 주장을 어떻게 파악하고 계신지가 개인적으로 궁금하네요.


또한 선생님은 시장의 여러 근본적 기능이 가지는 효용에 찬성하시지만, 블로그 글에서 소비에 있어서는 자연주의와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고 밝히신 바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개인적 결론에 도달하신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그저께 <개인주의와 시장의 본질>을 다 읽었고, 그 여자그림이 그려진 책으로 이제 넘어가려고 합니다. Baeminteacher 블로그 글도 계속 복기하고 있습니다.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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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lum tree, April 2022




답신 (내용 일부 수정)


안녕하십니까, 000 선생님


배민입니다. 먼저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 가지고 계신 사회적 문제의식에 깊이 위로를 드립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 방역은 해체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같습니다.

하지만 마스크도 그렇고 앞으로 또 어떤 비슷한 비이성적 정책들이 개인의 일상을 침해하게 될 진 알 수 없는 상황인 것같습니다.


선생님이 언급하신 책이나 작가들 중에는 제가 잘 알고 있는 분도 있고 생소한 분도 계십니다.

저도 불교를 좋아하지만 (종교가 아니라 역사학적 관심에서), 선생님의 불교 이해에 비하면 초라할 뿐입니다.


말씀하신 삶에 대한 시선을 담은 스님의 책과 제 책을 비교하기에는 제 책은 그 성격이 무척 다를 것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몇몇 리뷰어들의 글대로, 저의 책은 독자를 위로하는 책도 아니고 격려하는 책도 아닙니다.

오히려 선생님이 코로나를 대하는 한국사회를 보면서 느끼신 그런 감정 (답답함)으로 한국사회에 대해 쓴 책이 '개인주의와 시장의 본질'입니다.

즉,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서 쓴 사회과학서이지, 삶의 무게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인문학서는 아니지요.

오히려 지금 읽기 시작하셨을 제 이전 책이 인문학과 과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썼던 책이라 좀더 친절한 책이 될 순 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몇가지 질문도 주셨고 또 감사한 마음도 담아서 선생님께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제 책에 대해서 오해를 정정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욕망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개인의 욕망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국가적으로) 억압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시장이야말로 개인의 욕망을 제한하는 가장 효율적인 (평화로운) 수단이라고 생각힙니다.

반면, 집단의 욕망에 대해서는 주로 특정한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기 쉽기에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즉 개인의 욕망을 집단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개인이 자기 중심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러한 욕망들이 시장의 원리 속에서 자연히 타인의 욕망과의 경쟁 속에 제어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시장의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해야만 개인이 충분히 사회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시장 논리를 옹호하는 관점에 서 있습니다.

저는 친기업, 친재벌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기업 반재벌 입장도 아닙니다) 시장 찬양론자도, 욕망 찬양론자도 아닙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이고 물질중심적 욕망, 그리고 다른 인간에게 (그리고 사회와 자연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는 해가 될 수있는 욕망들을 스스로 경계하며 살아가려 할 뿐입니다.


자신의 욕망의 본질을 직시해야 그 욕망에 대항할 힘이 생기듯, 시장의 본질을 직시해야 시장에 지배 받는 삶, 즉 왜 경쟁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의미한 경쟁에 내몰리는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책에서 적었듯, 사회 속에서는 매우 다양한 시장들이 중층적으로 존재하며 이들끼리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의 경쟁에 대해서 저는 개인의 욕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이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국가가 (어떤 종류의 시장에 대해서든) 과도하게 개입하여 집단적인 논리 혹은 단순 환원론적 접근으로 경쟁을 제어하려는 시도에 반대할 뿐입니다.

경쟁을 할지 말지, 어떤 시장에 참여하여 어떻게 경쟁할 지는 개인 각자가 가지는 가치(value)의 우선 순위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저는 시장의 과시적이고 몰취미적인 혹은 그저 편리를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상품과 서비스들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제가 그런 것들에 그다지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태어나지 않을 자유'에 대한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운운하며 선생님께 도덕적인 설교를 할 생각은 없으며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단지 지구라는 별에서 생명체로서 존재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짧고 촌각에 불과한지 깨닫게 된다면, '태어나지 않을 자유' 를 동경하는 것은 지적 사치에 가깝다고 감히 저는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저는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고통은 저나 선생님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면 시작되는 영원 속의 공허에 비하면 소중한 의미(meaning)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을 피하는 것도, 행복을 누리는 것도 아닌, 결국에는 의미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배민 올림.




A plum tree, April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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