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가 역사를 규정하도록 해도 되는가 ...
재판으로 역사를 규정할 것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서 역사에 대해선 늘 새로운 접근이 보장되어야
지난 토요일에 내가 석사과정을 밟았던 대학의 교실에서 정기적으로 여는 조그만 학문 포럼에 참가하였다. 의학사와 인문의학을 주제로 한 정례 발표회 행사라 할 수 있는데, 그날 주제는 역사 정의를 화두로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세균전 관련 내용을 중심으로 한 발표가 이루어졌다.
마지막 발표자였던 나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의 발표내용은 일본 역사가 마츠무라 타카오의 '재판과 역사학'이라는 책의 역사적 의미를 소상하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731부대의 주제 연구에 대한 일본의 엄정한 scholarship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연히 최근에 석박사 논문 표절의혹 관련 조사를 받고 있는 조국 교수의 사례와 적나라한 대비가 되었다.
그날 총 네 분의 발표를 들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먼저 일본의 2차대전 세균전 부대의 연구는 그날 발표했던 한국의 한 교수와 일본인 박사과정 연구생의 연구 등이 보여주듯, 당시 한국인과의 연관성과 관련해서 앞으로 더 엄밀하게 진행 되어야할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하지만 이런 연구가 사회적 쟁점이 될 때에 기존의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와 함께 또 하나의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정치외교적 이슈가 될 것 같아 보여 우려가 들기도 했다.
이슈화에 경제적 유인을 가지는 언론, 그런 이슈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할 유인을 가지는 직업 정치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선동되어 그런 정치적 이슈들을 소비하는 주체인 대중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은 매우 높은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그러한 선동이 이제는 '사회적 각성'으로 둔갑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대중은 세뇌당하면서도 자신들이 "깨시민"이라는 착각 속에서 오히려 더 비장해지고 더 열정에 충만해져 가고 있다.
사실 인간을 생체실험 하는 잔인한 비인간성은 지금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다.
파룬궁을 따르는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붙잡혀 감금된 후 장기 매매를 위한 적출 대상으로 이용되어 왔다. 캐나다, 미국을 위시해서 많은 서방 국가들이 이 문제를 국제사회에 제기하였으나, 대한민국에서 그 어느 정치인 혹은 사회단체도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저 오다가다 길거리에서 파룬궁 신도에 대한 잔악 행위 관련 포스터를 개시하고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시민들을 본 적이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깨시민의 시야는 정치적으로 특정한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날 포럼에서 발표자와 질문자 사이에 오고 간 역사 재판과 역사가의 역할에 대한 질의 응답 역시도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일본에서 마츠무라 타가오 교수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법정에서 재판관의 역사적 시각을 전환하기 위해 애쓴 노력에 대해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재판으로 역사 정의를 세울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성을 잉태하기도 한다. 일단 재판을 통해 특정 역사적 시각이 정의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후엔 다른 역사적 접근은 부정한 혹은 해로운 시각으로 재단되고 그 정의로운 역사적 시각은 기득권의 지위에 서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무엇이 정의로운 역사인가를 재판을 통해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접근에 대해 늘 열려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 날도 한 발표자와 한 질문자가 '제국의 위안부' 소송 사건을 예로 들어 개인의 정치사회적 시각을 법정에서 명예훼손 건으로 심판하는 사안의 위험성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우파 정치인과 지식인들에게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안이다.
대표적인 예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5.18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전두환의 책은 출판 금지를 받았으며, 지만원의 경우는 그가 겪은 고초는 차치하고서라도 5.18 사건에 대해 그가 한 연구를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국회의원조차 신분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상황이다.
둘 모두에게 한국 사회는 그럴 듯한 이유와 명분을 가지고 그들의 생각을 억압하고 있다. 그 이유와 명분은 말 그대로 그럴듯해 보일 뿐이다. 하지만, 비판과 비하 (혹은 명예훼손)의 경계는 생각만큼 명확하지 않다.
한국에서도 ‘12가지 인생의 법칙’으로 유명한 Jordan Peterson이 'Academia does more harm than good (to society)'라고 Prager U에서 마련한 대담에서 주장한 적이 있다. 그는 그럼 서구의 학계 전체를 매도하고 비하한 것인가? 어떤 학자가 학계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자성을 위한 하나의 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정인을 비하하는 발언으로 비추어지는 경우는 그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조심해야 하지만, 특정인이 아닌 한 사회의 특정 직업군 전체 혹은 정치세력화한 특정 사회집단을 비판하는 경우는 명예훼손이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한 사회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는 자기비판으로 해석 되어야지 이를 그가 속한 집단에 대한 비하 혹은 매도로 해석한다면, 그 어떤 집단도 자정 능력 내지 자기 개선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민주화'라는 패러다임과 프레임으로 정치사의 많은 사건을 이미 재판을 통해 누가 정의인지 누가 부정인지 확정해버린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재판이었는가 우리는 다시금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야 하는 시점을 언젠가 맞이하게 될 것이다.
미디어워치 기고
등록 2019.12.15 14: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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