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적었던 블로그 글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기고글입니다.
지난 주는 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존재는 살아 있는 현대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기에, 그리고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국가 정책의 흐름과 변화가 학교 교육에도 미치는 바도 지대하므로, 나 역시 역사교사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그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던 지난 주에 내가 속해 있는 (정치 사회적 문제를 토론하는) 한 단체에서도 그 장례식에 단체 조문을 갈 것인가 개별적으로 조문을 갈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판단은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논쟁적이어서, 그의 죽음에 조문 가는 것조차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는 것도 그다지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역사적 판단을 독점할 권리를 가지지는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부 단체들이 주장하듯 역사적 판단이 국가 차원에서 확립되고 관리 되어 나가야 한다는 의식 자체는 다분히 국가주의적인 시각에 서있다. 이는 그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 뿐아니라 5.18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에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밝혀졌다는 자만이 한국에서 지금까지 온갖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구속하는 악법들의 밑바탕에 흐르는 의식이었다. 과거에 대해서 자유로이 말 못하면 현재에 대해서도 자유로이 말 못하게 되는 법이다.
80년대는 객관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 국민들이 희망을 갖고 밝을 미래를 꿈꾸던, 현대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좌파 사회학자들은 그 시대의 정부 정책을 3S (Sports, Sex, Screen)로 대표되는 국민 우민화 정책이었다고 비웃는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럼 그 이후, 90년대 이래로 한국 사회는 더 지적이고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정책이 시행되었는가?
물론 그런 정책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굳이 찾는다면 시장의 발달과 성숙이 그러한 정책의 기능을 하긴 한다). 만약 국가가 강제로든 교화로든 국민 개개인을 지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개조하는 정책을 시행한다면 그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 혹은 집단주의 사회임을 의미할 뿐이다.
내가 볼 때 지금의 시대는 그러한 80년대의 보다 건전하고 선진화된 사회를 꿈꾸던 열정조차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모습이다. 가령 지금은 80년대 보다 몇 배 더 심한 우민화 사회가 되어버렸는데도 그들은 아무 말 없다. 코로나 방역 조치로 인한 TV 시청 시간의 증가로 트롯트가 유행하고 있고, 사람들은 책은 커녕 휴대폰의 긴 문자 메시지도 읽기 지루해 하며, 뜻을 알 수도 없는 신조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우민화 정책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순한글 표기 정책에 입각해서 수십년 간 서서히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쓰는 단어들의 개념조차 잊어가고 있다. 소위 MZ 세대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어린 학생들이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면 정말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한자(漢字)는 자유로운 조어(造語)가 한글에 비해 한결 용이하다. 그런데 그런 한자의 효용을 전혀 살리지 못하면서 표음문자인 한글 단어를 가지고 생소한 단어를 만들어 가며 그게 마치 새로운 세대의 참신하고 기발한 모습인 마냥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는 그저 지성의 하향 평준화를 반영할 뿐이다.
또한 좌파 경제학자들은 80년대의 경제가 세계적인 3저 호황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으로 자연스레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왜 그들은 지금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그런 논리를 적용하지 못하는지.
2000년대 후반 이래 전세계적으로 금리는 양적 완화 정책으로 인해 유래가 없을 정도로 낮았고, 유가 역시 미국의 셰일가스로 인해 한동안 유래가 없을 정도로 낮았고, 달러 역시 트럼프 정부의 중상주의적 수출 정책으로 인해 유래가 없을 정도로 낮았었다.
자, 그래서 그동안 한국의 경제는 그 덕분으로 호황을 누렸는가? 전혀 아니다. 근래에 와서는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 보다도 처참하게 낮은 성장률을 기록해왔다. 원래 시장에서 자유롭게 투자가 일어나도록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서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나면 경제는 자연히 활황을 누리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빈부의 격차는 자연히 확대된다. 자본을 증가시키는 속도가 매우 빠른 집단이 인구 전체에서 소수이긴 하지만 출현하게 되고, 이들에 의해 자연히 부의 격차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많은 정부는 규제나 조세 등의 수단을 활용한 재분배적 경제정책을 도입하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부자가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몫을 취해갔기 때문에 빈부 격차가 벌어진 것이라는 집단주의적, 사회주의적 논리로, 경제정의 실현 혹은 복지를 명분으로 내세운 재분배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한국에서 1990년대 이래 좌파적 경제 정책들에 의해 강화되어 온 반시장적 경제 상황은 결국 투자를 위축시키고 자본의 해외 유출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국내 자본이 생성될 수 있는 원천이 고갈되고 점차 안전 자산 위주로 자본 투자가 집중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비유하자면 분수대의 물이 흘러 넘치던 것이 마르기 시작하니 분수대에서 멀리 떨어진 흙부터 마르기 시작해서 점점 분수대 중앙에만 물기가 남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부동산, 대학 등 모든 경제적 사회적 자본의 가치는 지방이 형편없이 몰락하고 서울로만 집중되고 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했듯 (좌파 경제학자들은 제외하고), 빈부 격차를 억지로 줄이려는 사회주의적 정책은 정확히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정치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어렵고 가난한 국민들을 위하는 진정 마음 따뜻한 사람들인 양 행동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역사가 말해준다.
조선시대 위정자들은 원래가 모두 비인간적이고 잔인해서 점점 시간이 갈 수록 백성들이 탐관 오리에 수탈 당하는 현상을 초래했을까?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정반대로 조선 정부는 국가가 백성을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 아껴야 한다는 민본(民本) 사상을 정치사상의 근본 원리로 강력하게 내세웠다. 그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지주들에게 갖은 세금을 매겨서 힘없는 백성을 도와주고자 했다.
이러한 강제적인 부의 재분배는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지주에게 매겨진 온갖 정의로운 조세들은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자연히 소작농에게 전가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시간이 갈 수록 소작농은 소작하기조차 (경작할 땅을 빌리기 조차) 힘들어 지고 소작료는 솟아 올랐다. 이는 지주가 악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악한 집단이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좌파적 시각, 특히 종적인 사회 흐름에 대한 시각이 결여된 횡적 사회 분석에만 열을 올리는 사회학적 시각 그리고 과학적 통찰을 무시한 채 뜨거운 열정과 정의감으로 인간 사회를 재단하고자 하는 인문학적 시각에 함몰된 이들은 결코 정책과 사회 현상 사이의 이러한 역설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저 선한 의도가 결과를 합리화 시킬 수 있다는 믿음 만이 존재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는 맑시스트 혁명가들의 사고와 유사하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현재의 대한민국은 주변부가 말라버린, 더 이상 신선한 물이 솟아 나지 않아 분수대 중앙부에만 물이 고여 있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고등학생들도 안다. ‘인서울’도 이제 의미가 없고, 소위 잘 나가는 한 줌의 명품 브랜드 대학들(당연히 서울에 소재) 혹은 취업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학과들이 아니면 굳이 진학해 봐야 돈, 시간, 에너지 낭비라는 것을. 교육 정책이 다행히 그들에게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과목 선택의 확대)를 지금까지 줄기차게 제공해 온 것은 그들이 점점 더 공교육, 즉 학교로부터 이탈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교사들이라면 누구나 느낀다. 학생들이 점점 학교를 다니기 버거워 한다는 것을. 그들이 단지 나약해서 혹은 게을러서 일까? 아니면 코로나 때문에? 이제 냉철하게 생각해 봐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사회적 자본의 가치가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사회를 살고 있는 구성원들이 내리는 경제적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 학생이라고 예외가 아닌 것이다.
이제 냉철하게 생각해 봐야 할 시점에 와 있다. 80년대의 한국인들은 강인하고 부지런한 인종이었고 지금은 한국인의 DNA가 바뀐 걸까? 왜 80년대 한국인들은 그토록 부지런히 일하고 또 화끈하게 놀고 화끈하게 싸웠을까? 그런데 왜 지금의 한국인들은 이토록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었을까? 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지켜 보며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Why Times [배민 칼럼] 기고 글
기사등록: 2021-11-29 21:28:10 / 수정: 2021-11-29 21: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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