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목적은 ‘인민 재판’아닌 ‘인간의 이해’
개인주의 자유주의자는 한국사 교과서를 쓸 수없는가?
개요
1.역사가는 ‘진실 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가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끊임 없이 ‘겸허하게’ 노력해 나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2. 역사를 정치의 ‘명분’과 ‘의도’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보다는 개인들의 삶의 변화와 그 원인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역사 접근이 필요하다. 가령 개인과 시장을 중심으로 역사를 접근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시각은 그러한 하나의 시도이다.
3.현재 만연한 ‘친일’, ‘뉴라이트’, ‘독재’, ‘민주화’ 등의 개념을 둘러싼 이분법적 잣대는 역사 서술의 주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역사 시각을 ‘위험한’ 사상으로 공격하는데 악용되고 있다.
4. 좌우가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각을 가지면서도 교과서에 담을 내용에 대한 합의를 만들고 이를 지켜나가는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1.
나의 전공이 의학사(history of medicine)이니, 의학사와 관련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할까 한다. 의학사를 연구하는 연구가라면 Henry Sigerist (1890-1957)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예전에 그 Sigerist 가 한 말이 인용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인용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역사를 기술하는 일에는 커다란 책임이 따른다. 역사가는 사료적 증거를 확보하지 않은 채 자의적인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 진실한 역사만이 가치가 있으므로 역사가가 기술한 과거는 진실이어야만 한다. 거짓된 역사, 무비판적이거나 경솔하게 쓰인 역사, 선전 목적으로 쓰인 역사는 항상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이 당연하게 들리는 Sigerist 의 말조차도 사실은 매우 논쟁적인(controversial) 주장이다. 사실 어느 역사가도 사료적 증거를 확보하지 않고 자의적 언행을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21세기에 현대 역사가 중 어느 누구도 감히 그런 짓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라기 보다는, 서로 다른 사료가 서로 다른 사실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같은 사료라도 역사가가 서로 다르게 해석할 때.. 어떻게 말해야 하느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보통의 역사 연구가들이 매일 마주치는 일상의 상황에 가깝다.
20세기 전반에는 - 전체주의가 횡행하고 미국의 존스 홉킨스 병원과 의대를 중심으로 의학사라는 새로운 역사 분야가 발전해 나가던 (Sigerist 가 활약하던) 시절엔 - 의학사 연구하던 학자들이 대부분 의사들이었다. 그 의사들은 (근대에 들어와 의학 만큼이나 새롭게 발전하던) 역사학을 공부하며 의학과 역사학을 접목하는 데 있어 신중함과 막중한 책무성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의학사 연구는 일반 역사학을 전공한 역사가들이 더 많이 연구하는 분야가 되었고, 위에서 인용된 Sigerist의 주장은 오히려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진실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쪽에 가깝다.
현대 역사 연구가들은 이제 19세기처럼 ‘진실을 말해야 한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진실을 말하는 게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옛날처럼 전체주의적 압력에 맞서 역사가가 자신의 양심을 걸고 연구 결과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는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사료에 대한 새로운 수정주의적 해석이 활발해져 오면서, 역사가들은 이제는 사료(historical source)와 매일 매일 사투를 벌이며 자신이 쓰는 논문이 혹여라도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늘 걱정하며 살아갈 뿐이다.
물론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세부적인 사료들에 함몰된 현대의 환원론적 역사학 흐름 자체는 나름의 비판의 여지를 가진다. 하지만 어쨌든, 현대 의학사 연구가들 중 누구도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연구가는 이제 없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그러한 학문 공동체 전체의 노력과 성과에 일말의 긍정적인 기여라도 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하며 일할 뿐이다.
얘기하다보니 너무 길게 의학사 연구자로서의 나의 생각을 이야기한 느낌이 들지만, 나로서는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진실’을 이야기 한다. 내가 학부를 나왔던 대학의 슬로건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성경 말씀의 한 구절이었다. 하지만 진리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에 비해 하등한 존재에 불과한 인간의 지성으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단지 진리에,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성경 중에 내가 좋아하는 욥기에선, 여호와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은 신실하기 그지 없다고 믿는 욥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욥기가 가장 반신학적인 성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학 자체의 존재 이유를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인간 존재, 인간 이성의 보잘 것 없음을 말하고 있는 성서가 욥기이기 때문이다.
내 종교적인 믿음 뿐 아니라, 내 불완전한 이성의 눈으로 볼 때도 현대 역사학, 현대 의학, 현대 경제학, 현대 정치학.. 어느 학문도 진실에 도달했다고, 진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학문 분야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안에서 수많은 연구가들은 어제도 오늘도 치열하게 논쟁하고 토론한다. 내일도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아무도 자신이 연구한 결과가, 공부한 지식이, 진실이라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2.
이번 사태에서 이슈가 된 용어는 뉴라이트였다. 집에 TV도 없고 (검색도 구글에 의존하다보니) 국내 포털 웹사이트도 거의 들어가지 않고, 그 결과로 국내 뉴스에 둔감하게 살아온 나는 광복회라는 단체가 지난 달에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뉴라이트로 판별하는 9가지 항목을 발표했었다는 사실을 어제에서야 인터넷에서 알게 되었다. 내가 이 9개 항목 중 관련되는 부분, 그리고 내가 볼 때 광복회의 주장에서 특히 문제 되는 부분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은연중 주장하는 자’ 라고 적시된 항목이다.
나는 2000년대 후반 이영훈 교수 등이 공저로 출간한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를 읽고, 내가 학교에서 사용하던 한국사 교과서와 비교할 때 적어도 학문적 관점에서 훨씬 더 잘 쓰여진 책이라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가장 신선했던 부분은 경제사학자였던 그가 객관적인 통계적 연구 결과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부분보다도, 오히려 그가 역사학에 접근하는 시각이었다. 그것은 비단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시각차가 아니었다.
나중에야 왜 내가 그의 ‘대안교과서’ 서술이 기존의 한국사 교과서 서술보다 더 신선하게 느껴졌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개인주의적 사회관 및 세계관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뉴라이트가 단순히 피도 눈물도 없이 일제 시기 역사를 숫자와 통계로 말하는 ‘객관적인 채 하는’ 역사 서술 시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물론 좌파들은 더 나아가 그런 역사 서술의 ‘의도’가 일제 식민지를 미화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며 뉴라이트는 친일파라는 도식으로 뉴라이트의 역사 서술을 인식한다.
하지만, 개인주의자인 나의 시각에서 당시 이영훈의 뉴라이트 서술에서 가장 신선했던 점은 한국 근현대사 서술에 ‘시장’과 ‘개인’의 존재를 비로소 분명히 조명하기 시작했던 점이었다.
그 이후 나 역시 조선시대, 일제시대, 현대사 각각에서 집단적이고 추상적인 우리 민족이라는 개념보다는 한국인 개인과 시장이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병자 호란 이후 조선 후기의 국가 정책, 특히 수취정책 (가령 과전법)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양반의 기득권 보장이 아닌, 농민 구제를 강하게 지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 시행의 결과 자영농의 몰락과 토지 유리화는 더더욱 심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 실패는 단순히 지주들의 저항과 탐욕으로만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지주는 착취하는 지배계층이고 농민은 착취 당하는 피지배층이고 하는 이런 맑시즘적 사회주의 구도로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으로는, (상당히 분배와 평등을 지향했던)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펼쳤던 조선 후기 중앙정부의 노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나타난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농민이 처했던 지옥같은 상황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뭔가 착취하려는 기득권 세력과 착취 당하는 (그래서 개혁과 혁명을 갈망하는) 세력으로 이분화하는 집단주의적 설명 구도 보다는, 개인과 시장에 초점을 맞춘 경제사적 설명이 나는 더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다. 이러한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 후기 상황은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는 사회에서 빚어진 (오스트리아 경제학에서 말하는) ‘정부 실패’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비대하게 중앙집권화된 정부 기능의 부패가 폐쇄적 사회의 특성으로 인해 전혀 제어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중요한 점은, 누구도, 심지어 양반 개인들 조차도 이와 같은 (모든 개인들이 불행해진) 상황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농본주의에 입각한 유교적 민본사상과 왕도사상은 한번도 조선에서 명분과 대의에 있어서 강조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애당초 물질보다 정신을 숭상했던, 검소와 청빈을 신조로 삼았던 성리학자들이 고려시대 사치가 극심했던 귀족세력을 몰아내고 도덕적 명분 하나로 세웠던 나라가 조선이었다.
개인과 시장에 초점을 맞춘 나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시각에서, 명분과 의도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조선 후기 상황의 원인은 정부 실패였음이 명확했다. 이를 비슷한 시기, 즉 에도 시대 일본 사회와 비교하면 더 확연했는데, 그런 연유로 일본에 갈 때마다 그 사회의 모습, 그 안에 녹아 있는 과거의 모습들 그리고 이를 역사학적으로 분석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비교사적인 시각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데 필수적이다. 한국의 좌파 언론은 조선의 역사를 이렇게 일본이나 동시대 다른 사회와 비교하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같다. 하지만 조선 역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로 역사를 연구하는 한국인 연구가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연구가들은 보다 객관적인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할 뿐이고, 한 국가의 상황을 동시대 인접한 국가의 상황과 비교해 보는 것은 보다 객관적인 역사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마찬가지로, 일제 시기 한국인의 삶을 이전의 조선 말기과 비교하는 것도 좌파 언론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편견을 가지고 바라본다. 하지만 한 시대를 이전 시대와 비교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historical context)을 보다 객관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역사 연구자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3.
일제 시대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나는 이영훈 교수가 그저 숫자와 통계 놀음에 빠져 ‘식민지 근대화론’을 선동하고 있다는 좌파 언론의 비판, 그리고 일부 우파의 그런 견해에 대한 동조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한국사에서 19세기와 20세기 전반의 차이에 그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이 차이의 본질은 숫자보다 철학에 있다고 생각하며, 나의 이런 시각 역시 경제사학자였던 그의 책과 논문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에겐 멘큐의 경제학 교과서 만큼이나 통찰력 있고 설득력 있는 시각이었다.
경제사적인 관점에서는, 역사를 기존의 정치 세력 간의 갈등, 착취 집단과 피착취 집단의 대립 등이 아닌, 인간이 어떤 조건 하에서는 게으르게 행동하다가 어떤 조건 하에서는 매우 부지런히 행동하게 될 때, 개인들의 행동 변화의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해당 시기를 바라보게 된다.
19세기에 절망과 무기력에 빠졌던, 숱한 농민 봉기로 점철되었던 사회가 20세기 전반기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시장이 확대되고 그 안에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개인들이 증가하였다. 3.1운동 조차도 이전 세기 임술농민 봉기와 비교하면, 가렴주구하는 탐관오리에 대항해 단지 생존을 위해 일어난 봉기가 아닌, 1910년대 ‘한국인 개인의 정체성’과 매우 깊이 관련된, (메슬로우의 인간 욕망 위계 서열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지적, 도덕적 열망이 분출된 historical event였다.
중요한 건 친일인지 아닌지, 식민지 근대화론인지 아닌지 이분법적 도식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고 있던 한국인들 개인의 삶이 한 차원 한차원 철학적으로, 즉 지적, 도덕적인 측면에서, 발전해 나갔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있다. 이건 일제가 잘했다 못했다 우리가 잘났다 못났다의 유아적인 사고 구조를 벗어난, 사상사적, 사회사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키나와나 대만처럼 일제에 강제로 병합되었던 다른 지역과의 비교사적 시각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 한국인들의 여러 사회적인 활동들에 대해 착취와 수탈에 대한 저항이라는 답안에 끼워 맞추려는 경직성이 아닌 보다 열린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가령 1920년대 사회비판적인 대중의 각성이 분명 새롭게 분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그들의 목소리가 착취와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단정짓기 전에, 거기에 담긴 비판적 시선과 견해, 주장의 내용이 사회사적으로 그 이전 세대와 비교하여 어떠한 점이 달라졌는가를 보다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만은 욕망의 반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이 그 이전 시대와 비교하여 삶의 욕망에서 어떠한 부분이 변화되었는지에 관심을 더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에게는 일제시대 한국인의 삶은 여전히 그 본질이 의문 부호로 남아 있다. 이전 19세기와 비교해 개인들의 삶의 모습이 너무도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동질적인 삶의 환경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이 매우 이질적인 삶의 환경들을 스스로 개척해 가고 있던 시대였다. 즉 나로서는 이 시기의 역사적 진실이 계속 궁금할 뿐이다. 정치 집단의 ‘의도’를 선한 혹은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런 의도로서 한 시대를 규정하여 당시 사회적 상황, 개인들 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모두 그러한 틀로 설명하고자 하는 경직된 사고를 경계한다.
이러한 나의 관점에서 (한국인 개인의 삶의 연속성이란 차원에서)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오히려 1910년대에 한국인 개인의 사적 재산권이 근대 민법적인 토대 위에 확립되어져 나간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또 좌파 언론은 조선민사령을 얘기하는 것이냐, 식민지 근대화론이냐.. 또 이런 식으로 나의 의도를 편견을 가지고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1912년 일제가 실시한 조선민사령 내용 속의 철학적 핵심 개념들은 대부분 18세기 이래 유럽에서 발전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근대철학, 그리고 근대 민법으로 대표되는 근대 개인주의적 법철학 사상을 반영한다. 자꾸만 좌파 언론들은 일제 시대를 조선총독부의 정책에만 초점을 두고 바라보지만, 그런 식으로만 이 시대 역사를 바라보면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한국 근대사에서 문화와 사상의 교류, 즉 교류사적인 측면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게 된다.
4.
즉 좌파 언론은 뉴라이트인지 아닌지 따지면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친일 반일의 흑백 논리 구도로 몰아가려 하지만, 나는 그런 데에 관심이 없다.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중요한 관점은 독재냐 아니냐, 민주화 운동이냐 아니냐의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와 거리가 멀다.
현대사에 대한 기존의 교과서 서술들은 일제시기를 서술하는 (착취에 대한 저항이라는) 기본 대립 구도의 연장선에 있다. 단지 이전 시기 일제가 현대사에선 독재 집단으로, 이전의 독립을 갈망하는 식민지인이 현대사에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민중으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역사를 이분법적인 대립과 그 변증법적인 진보로 구도화해서 해석하는 것은 맑시즘적 유물사관에 그 뿌리가 있다. 적어도 나는 역사 흐름을 이런 식으로 단선적인 (linear) 진보의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20세기를 관통하는 한국사 서술의 주류 시각은 이러한 맑시즘적 사회주의적 시각과 민족주의 시각이 결합한 형태로 존재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사회주의 세계관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주류 역사관으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왜 지금의 한국사 근현대사 서술이 좌편향되어 있다고 보는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이건 나의 시각에서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라서, 아마 많은 사람들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한국사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주류 한국사적 시각에 근거한 현재의 교과서 집필 기준에 맞춰 쓰여진 교과서들이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9종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이다. 즉, 내가 참여한 교과서가 위와 같은 민족사회주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주류 역사적 시각으로부터 자유롭게 쓰여진 교과서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한국사학계와 역사교육학계에서 어렵게 지금까지 합의하여 마련된 교과서 집필 원칙을 거부할 수도 없고 거부할 마음도 없으며, 거부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히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내가 집필한 교과서가 의미 없다고 절대 보지 않는다. 내가 집필한 교과서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학자들의 합의 원칙을 소수의견을 가진 집필자가 비록 주류 시각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을 따라서 집필하여 정당한 절차에 의해 인정받을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의 역사학과 역사교과서가 민주적으로 안정된 절차와 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현재 좌파 언론은 내가 집필한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지만 위험한 (뉴라이트) 사관을 교묘히 감추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오히려 내가 집필한 교과서는 우파와 좌파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가운데에서도 (교과서에 담을 내용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를 존중하고 공존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뿐이다.
즉, 한국사학자들의 의견은 모두 다양하고 다를지라도, 합의된 원칙을 만들고 여기에 따라야 한다는 데에 나는 절대 이의가 없다. 오히려 이렇게 합의된 원칙에 따라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를 집필자 개인의 역사적 시각을 빌미로 – 현재 야당이 주장하는 데로 - 만약 검정 철회를 강제한다면, 이것은 한국사학계와 역사교육학계에서 어렵게 이뤄낸 합의의 틀을 야당과 일부 좌파 역사단체가 나서서 부정하고 자신들 입맛대로 원칙을 흔드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24.09.08. 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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