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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이상적인 입시 제도를 꿈꾸며



역설적인 제목을 일부러 잡아보았다.

이상적인 입시 제도는 없다.


A를 가지고자 한다면 B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정책 결정의 딜레마이다.

영미 속담에 You can't have your cake and eat it 이라는 말이 있다.

입시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90년대 이래 지금까지 입시제도의 큰 변화 추세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국가가 시행하는 대입 시험의 비중 축소와 다양한 대학별 수시전형의 확대.


전자와 후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이므로 둘은 제도 시행에 있어서 분리해서 생각하기 힘들다. 학생이 실력이 뛰어난 만큼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 대입에 있어서 신뢰도의 핵심이라면, 이 두 변화 추세는 모두 신뢰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타당도에 초점을 맞춘 입시제도이다. 대학교가 요구하는 자질을 학생이 얼마나 갖추었는지를 모든 대학교가 제각각 자신들 나름대로 분석하여 학생의 가치를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시장에서 사용자가 구직자를 채용하기 위한 평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는 미국의 개인주의적인 노동시장처럼 당사자 간의 계약체결이라는 성격이 강하고 진입 및 탈퇴 장벽이 낮은 경우에 매우 효율적인 체제이다.


대체로 학생부 비교과 내용, 면접 구술 시험, 자기소개서, 교사 추천서 등은 신뢰도를 희생시키고 대학입시의 타당도 제고를 위해 채택된 전형요소들이다. 대학 입장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반기겠지만 고등학생들의 시각으로 보면 입시에 있어서의 불확실성이 크게 증폭되는 셈이다.


물론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을 결판내는 국가 주도 대입시험은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바라보는 비판은 늘 있어왔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내신 성적 (학생부 교과성적)은 대학입시의 수많은 전형 요소들 중 국가 시험 다음으로 신뢰도가 높은 전형요소로서 국가 시험을 보완하는 기능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학들은 그다지 학생부 교과 전형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같다. 특히 학생들이 선호하는 명품대학일 수록 더더욱 그렇다.


특히 정시 전형이나 학생부 교과 전형 등과 비교하여 최근 한국의 인기 있는 명품 대학교의 핵심 전형인 학생부 종합 전형은 '학생의 입장에서 볼 때' 떨어질지 붙을지가 대학의 입맛대로이다. 워낙 엇비슷한 많은 경쟁자들이 많이 지원하다보니 그 해 지원 대학의 입학 사정 기준에 비추어 경쟁자들보다 outstanding한 것으로 판명되면 붙는 것이고 아니면 떨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한마디로 90년대 이래 지금까지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덜 열심히 공부해도 더 열심히 공부한 경쟁자를 이길 수 있는 이유에 대한 변명과 명분을 계속 입시제도에 의해 선사받은 셈이다. 그 반대의 경우 (더 열심히 공부해도 덜 열심히 공부한 경쟁자에게 지는 경우) 역시 같은 비율로 증가해왔을 것이다. 즉, 지금까지 30년간 국가시험 의존도를 계속 줄이고 대학의 자유로운 선발권을 보다 많이 부여해온 결과, 입시에 있어서의 신뢰도는 충분히 저하되었다.


국가 시험 역시도 타당도를 내세운 도전에 직면해 있기는 마찬가지다.

국가가 시행하는 대학 입학 시험을 선다형인 아닌 논술형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교육 전문가들이 많다. 하지만,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식하건 못하건 간에)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본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뢰성을 가지기 힘든 시험이 논술형 시험이다. 교사임용고시의 주관식 문제처럼 구체적인 지식의 이해나 기억 여부를 질문하는 짧은 서술형시험이라면 신뢰성의 저하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요즘 대학 별 고사에서 볼 수 있는 논술시험은 지문 독해여부와 함께 지문 속의 쟁점들 (대부분 논쟁적 사안)에 대한 논리적인 의견 개진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논쟁적인 사안을 제공하기 위해 대학이 선택한 지문들은 결코 가치 중립적일 수 없다. 그 논술 문제를 만든 학자들이 가지는 인간관과 세계관이 지문과 질문의 배경 철학을 형성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의 포스트 '논술 문제에 대한 생각' 을 참조) 선다형이라면 문항 제작자가 가지는 주관적 시각이 질문 단계에서 공개적으로 검증이 되고 평가에 개입될 소지가 적으나, 논술형에서는 그렇지 않다. 예산을 많이 소비하여 다수의 평가자에 의한 다중 평가를 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순 있겠으나, 평가자들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시각이 본질적으로 학생 평가의 신뢰도를 저하시킬 여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hegemony를 장악한 학문 영역 집단의 시각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생의 입지를 불리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이전의 포스트 '인헌고 사태의 본질적 문제' 를 참조) Robert Owen이 학교장인 학교에서 (교사들도 그와 같은 사회적 시각을 공유한다고 가정할 때) Ludwig von Mises 학생이 써낸 논술 답안이 Karl Marx 학생이 써낸 논술 답안과 비교하여 정당하게 채점될까.


미국과 일본에서는 여전히 대입 국가시험에 선다형을 지속하는데 반하여, 학계와 교육계의 사회주의 성향이 더 강한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대학입학 국가시험이 논술인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논술 국가 시험과 학계의 좌파적 성향의 지속적 재생산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난 생각한다.


즉 논술 시험은 그 본질적인 신뢰도에 있어서의 약점 뿐만 아니라, 논술 시험의 본래 취지인 보다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측정한다는 목적에 부합하기 보다 오히려 한 사회의 교육자와 지식인들 다수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과 세계관의 프레임 속에 학생들은 더더욱 갇혀 버리게 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기본적으로 선다형 및 간단한 서술형 위주의 지필평가가 대학 입학 시험으로서 계속 존치되어야 한다고 본다. 단지 대입의 신뢰도 및 타당도와 관련하여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정시와 수시 비중에 관한 논쟁에 대해서는, 국가가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국립대학에 대해서만 국가가 관여하면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정시와 수시 비율은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이다.


고등학생과 대학교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학력시장의 구매자와 판매자의 관계를 띤다. 90년대 이래로 대학들이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우리가 수시전형이라 부르는) 다양한 전형 요소들을 채택해왔고, 이제 대학입시는 학력시장에서의 가치교환의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단지 지금까지 30여년간 입시제도는 학력시장에서의 구매자 보다는 판매자에게 유리하게 판도가 흘러왔다. 구매자인 학생 입장에서는 대학들의 서열 구조가 여전히 건재하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A대학을 선택하거나 B대학을 '선택할 자유 (freedom of choice)'는 이론적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과거시험과 문벌사회의 역사를 간직한, 서열화된 학벌의 전통이 아직 뿌리깊게 남아 있는 한국사회의 대학입학 체제에 개인주의적 영미 노동시장의 철학인 쌍방 계약적 원리를 도입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입시지옥'으로 고통받는 학생들을 위한다며 시행한 정부의 정책은 정확히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그리고 교사가 학력시장에 개입하면 할 수록 장기적으로 볼 때, 문제 (대학서열화와 고교 교육의 입시 위주 파행)는 더 악화된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할 일은 규격화된 대학 입학 시험을 공정하게 운영하는 것이고, 고교 교사의 책무는 학생들의 내신을 공정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학생이 수업을 충실히 듣는 것과 학생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이다. 전자를 지도하는 것은 고교 교육의 진정한 의미이며, 후자의 본질은 명품 대학교 졸업장을 구매하고 싶은 학생들이 그 만큼의 자신의 가치를 판매자에게 증명해 보이는 과정이다. 따라서 교사는 후자에 관여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교사가 후자의 과정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순간, 수시 제도의 공정성은 본질적으로 위협받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대학교의 학과를 나만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보장 받는 것이 정의롭다고 여길 정도로 양심 없는 학생은 최소한 없을 것이다. 시장에서의 경쟁은 불가피하다. 중앙 통제식 배분에 비하면 경쟁을 통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훨씬 구매자에게도 판매자에게도 이익인 상황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입시 지옥' 속에서 고통받는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학력시장이라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서열화된 대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 다시 차별과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일단 학력시장의 개념과 관련해서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난 30년간 신뢰도를 포기해가면서 타당도를 쫓아 학생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영미식 입시체제를 운영해왔다면, 그 체제의 근간인 자유로운 계약 체결이 보장되는 공간으로서의 학력시장의 성립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열심히 영미식 제도를 받아들여 시스템을 바꾸어 놓고선, 여전히 학생들이 명품대학교의 졸업장이 아닌 진리 추구와 민족 중흥을 위한 인텔리겐챠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대학에 가길 바란다면 그건 모순이다.


이미 엄존하는 학력시장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은 오해를 한다.

삼성이 지금 1위고 현대가 2위면 10년 뒤 혹은 20년 뒤에도 그럴까. 1, 2위는 그렇다 치고 10위와 11위의 서열은 어떨까. 대학교가 워낙 성공적인 비지니스 유형이다보니 사람들은 그런 착각을 하고 산다. 사실 인구 절벽을 앞두고 학생 보다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대학들이다.


설사 지금 명품 대학교가 10년 후에도 50년 후에도 명품의 지위를 누린다고 해도, 한국 사회의 학벌 차별을 무슨 수로 입시제도를 변경하여 해결할 것인가. 집단주의 사회의 고질병인 수직적 인간관에서 비롯되는 차별은, 사회적으로는 (수평적 인간 상호간의 존중을 핵심으로 하는) 개인주의 의식의 확산을 통해서, 경제적으로는 고용시장의 장벽을 낮추어 사용자가 보다 과감히 인력 채용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 각 대학교 졸업장들이 가지는 가치에 존재하는 격차를 인위적으로 없애려고 학력시장에 정부가 개입하게 되면 통제 불가능한 부작용을 초래할 확률이 높다.


둘째로 어린 학생들이 그 나이에서부터 너무 경쟁과 공부만을 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이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올바른 '민주시민'으로서의 성숙을 방해한다는 논리이다.


이는 경쟁 자체를 악으로 보는 사회주의적 논리이다. 즉, 학생이 고통받는다 - 이들 정의로운 학생들은 부정의한 사회로 부터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그들은 보호받고 구제되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인데, 이는 전형적인 좌파적 사회시각, 즉 이분법적으로 가진 집단과 못가진 집단을 나누고 후자가 전자에게 착취 억압 당한다는 사회주의적 프레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논리도 논리이지만 가장 전제가 되는 명제, 학생이 고통받는가?에 대해 냉정한 분석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는 것이 왜 고통인가. 인간의 긴 역사에서 공부는 언제나 지배층만의 특권이었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강요한 주범은 사실 학생 자신이다. 기왕이면 더 '높은' 명성을 가진 대학교에 가고 싶은 욕구가 주범이라 하겠다. 그런데, 미래의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오늘의 자신의 땀과 시간을 투자하고자 하는 것은 시장에서 인간이 행하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경제적 행위이다.


다만, 학생들은 교실에서 수업을 충실히 들을 것을 '지도'받는 것이지, 경쟁하도록 강요받지 않아야 한다. 명품 대학교 졸업장을 구매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며 그 경쟁은 국가와 교사에 의해 공정하게, 신뢰도 높게, 관리되면 그만인 것이다.


사회주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정부는 흔히 정의감에 불타 열정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상황을 악화시키기 쉽다. 교육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는 쉴새없이 입시제도를 고쳐왔고, 교사들 중의 많은 수는 자신들에게 원칙상 주어진 임무는 아니나 유언 무언의 압박 속에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책무, 즉 학생을 더 명품 대학에 보내는 일에 많이 신경 써온 것이 사실이다.


왜 교사가 학생의 이기적인 욕망, 명품 대학교 졸업장을 구매하고 싶은 욕구에 신경써야 하는가에 대해 이제는 문제를 제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교사가, 그리고 한 학교가 그렇게 학생에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지원을 한다면 다른 교사도, 다른 학교도 그럴 것이다. 한국에서 자신이 맡은 학생을 자식처럼 사랑하지 않는 교사가, 그런 학교가 있는가. 부동산 시장의 거품처럼 학력 시장의 버블이 이렇게 더욱 고조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부동산 시장과 학력 시장은 그 본질이 비슷하다. 두 시장 모두 시장 참가자들이 갖고 있는 환상 (집값은 계속 오를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학벌이 인생의 행복을 결정하리라는 강박관념)이 거품의 주 원동력이다. 하지만, 학력 시장에서의 가격의 거품, 즉 비효율을 초래하는 과열 경쟁 (실물 자산 가치를 훨씬 상회하는 부동산 가격처럼 실제 대학교 경쟁력을 훨씬 상회하는 고교 학생의 입시를 위한 노력)에 학교와 교사가 지금껏 의도하지 않았던 기여를 해온 것은 아닐까. 경제학적으로 사회 현상을 바라볼 때 흔히 마주치게 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아니 그 좋은 의도에 정반대의 결과를 종종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 말이다.





in my schoo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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