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본을 처음 갔던 때는 2017년 봄이었다. 컨퍼런스 참석차 히로시마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처음 가는 일본 여행이라 마음이 들떠서 히로시마 외에도 도쿄 지역의 여러군데를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나는 여러차례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매번 여행의 소감을 여행 일지에 차곡차곡 적어 두었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내가 봐왔던 일본의 역사와 사회에 대해 내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생각의 정리에 앞서 사진과 함께 내가 끄적였던 기록들을 간략히 여기에 옮겨 적어 본다.
그 첫 편으로 오늘은 '축대와 개천'을 주제로 적어볼까 한다. 사진들은 2019년에 일본 미시마(Mishima)에서 며칠 간 묵으며 아시타가 산 (Mt. Ashitaga)과 아시히 호수(Lake Ashi) 등을 걸어서 다녀오며 찍은 사진들이다.
1. 축대와 개천
아시타가 산에서 미시마로 돌아가는 길에서 본 옛마을의 모습. 특징적인 낮은 축대로 조성된 밭과 집터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낮은 축대와 함께 특징적으로 만나게 되는 마을 구조물은 개천이다. 작은 개천이라도 복개하지 않고 물길을 잘 보존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본에서 특징적인 높고 낮은 수많은 축대들은 마을 안 뿐 아니라 도로 주변에서도 흔히 눈에 띈다. 도쿄의 황궁이나 각 지방의 성(castle)들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축대가 일본 건축사의 한 특성이기는 하지만, 위의 사진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서는 생활 속 곳곳에서 축대를 쉽게 볼 수 있다. 축대는 자연과 인공 사이의 명확한 경계선을 형성하는 동시에 자연의 공간을 최대한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일본 토목 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도쿄 시내의 곳곳에서도 수많이 흐르고 있는 개천과 그 위로 놓여진 다리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지만, 개천 또한 작은 대도시 근교나 작은 지방 도시들에서 가장 흔히 마주치게 되는 대표적인 일본의 특색이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축대와 마찬가지로 개천 또한 80년대가 지나서 90년대에 오게 되면 전국적으로 사라지게 된 대표적인 옛 기억 속의 풍경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김영삼 정부 때부터 시작된, 소위 '왜색'을 지우기 위한 90년대 이래의 시도들(아마도 그 가장 정점은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해체와 철거일 것이다)은 사실상 그 때부터 도시의 주거 풍경과 전체적인 미관을 지금껏 지속적으로 숨막히는 느낌이 들게 만들어온 주된 추동력이었다. 그 결과 대표적인 '왜색'이었던 축대와 개천은 사라지고, 그와 함께 녹지도 지속적으로 사라졌다. 특히 서울의 경우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심을 땅 대신에 다세대 주택 건물, 주차장 그리고 끝 없이 넓어지는 도로가 도시 면적을 점차 채워왔다.
사찰이나 신사와 같은 문화적인 녹지 공간이 풍부한 일본의 도시들과 달리, 한국의 도시에서는 정책적으로 녹지를 보존하려는 대대적인 시도가 없는 이상, 그리고 단기적 경제적 이해를 떠나 장기적 시각으로 그러한 정책적 시도를 지지해줄 유권자들의 마인드가 없는 이상, 도시 전체의 시멘트화와 사막화는 예견된 일이었다.
사실상 중국의 도시들과 매우 흡사하게 변해버린 한국의 도시들은 90년대부터 줄기차게 이어져 온, 왜색을 지우자는 반일 감정을 앞세운 정치적 선동의 결과물인 셈이다. 특히 그러한 한국인 자신들의 의지와 욕망, 자부심, 이해 관계가 만들어낸 최종 결과물인 서울의 3대 상징을 뽑자면 아마도 활주로같이 넓어진 도로, 녹지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다세대 주택 건물, 그리고 한국 집단주의 문화를 체화한 아파트 단지일 것이다.
이 찬란한 도시 풍경의 의미는 하나의 표현으로 간단히 정리된다. 자동차의 왕국 (the Republic of Cars). 사람이 아닌 자동차들이 주인이 되어 보행자를 통제하는 공간이 되어 버린 곳이 한국의 도시이며,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서울이다. 이 기괴한 도시에서는 도로와 주차장, 즉 자동차가 도시 공간의 철학과 생리학을 지배한다.
보행자의 시간은 불필요하게 설치된 (보행자 우선의 원칙이 사회적으로 결여된 결과이기도 한) 수많은 신호등과 악명 높은 긴 신호 대기 시간으로 인해 착취되고 있으며, 그 결과 이 도시의 보행자들은 걷기에 매력을 느끼기 보다 대부분 자동차에 매달려 산다. 그 결과 저 넓은 도로에도 불구하고 교통체증은 만성적이다.
서울에 새로 지어진 지하철역에선 무슨 유행인양 계단도 대거 에스컬레이터로 교체되어, 아무리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아예 계단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하는 곳도 많다. 물론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적응해 살고 있는 이 기괴한 모습이 매우 이상하고 자신들의 건강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보다, 그 편리함에 만족하고 오히려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도 보인다.
반대로 나무와 풀들이 자라날 곳들은 지속적으로 제거되어 이제 몇 그루, 몇 평 남지 않은 나무와 녹지 공간들은 온갖 '힐링'을 앞세운 명패와 팻말들로 장식되어 있다. '사람이 먼저'라고 외치며, 민주 시민의 '소통'을 강조하는 정치적 구호가 사회적 담론을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땅속 뿌리로 소통하는 나무들에게는 함께 그들 사이에 흙을 통해 교감할 수 있는 군락지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 집안에 두고 키우는 분재마냥 도시 안에 나무들을 시멘트 감옥소 속에 분리시키고 소외시켜 왔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서울 사람들은 나무가 100 그루 정도 이상이 함께 심어진 (숲이라 할 것도 없는 사실상 아기숲)공간을 구경하기 위해서 이제 몇 남지 않은 산에 올라가거나 혹은 한강에 떠 있는 밤섬을 보는 것이 유일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렇듯, 왜색을 지우자는 선동 아래 지난 30여년간 이루어진 한국적 (사실상 중국의 신흥 도시들과 유사해진) 도시 풍경이 만들어 낸 저열화된 서울의 도시 문화 속에서, 시민들은 이제 청계천 같은 (펌프로 돌리는) 인공 개천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서양식 건축물이자 대한민국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적 의미를 함께 가졌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에 비하면 화장실 창고 수준의 예술사적, 유물사적 가치밖에 지니지 못하는 얼마 안 남은 오래된 서양식 건물들에 낭만적 향수를 느끼고 있는 상황이다.
그 압권은 아마도, 서울의 상업 지구,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번화한 곳에선 일본 스타일을 노골적으로 (혹은 자신들도 모르게) 내세운 가게들이 정갈한 디자인과 분위기로 인기를 끌고, 심지어 그 가게들 앞에는 '일본 스타일로' 고객들이 줄지어 서서 몇십분을 기다리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스팔트와 시멘트에 내몰려 뿌리 내릴 곳조차 없는 나무들은, 단순히 한국 사회의 메마른 정서가 아닌, 황폐화된 한국인의 자연관, 결핍된 한국인의 정신 세계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도시 풍경 속에선 사색과 성찰은 점차 사치가 되어갈 수밖에 없다.
아시타가 산 가는 길:
미시마 시내의 신사와 나무들:
하코네 가는 길:
아시이 호수에 다다르면 하코네 관을 볼 수 있다. 하코네 관은 옛 에도 시대 도카이도를 통한 물류의 이동을 검사하기 위해 설치된 관문 중 하나이다. 옛 도카이도를 통해 일본은 이미 17, 18세기에 엄청난 양의 물화의 이동이 중앙과 지방 사이에 이루어졌고 전국적으로 보면 막대한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오사카 쌀 시장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 시장경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고, 이는 국가 재정 내지는 세수 규모와도 직접적으로도 연계가 되는데, 가령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의 세입 1255만석은 인구가 월등히 많은 청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참고로 그 당시 조선은 96만석) 하코네 관은 그러한 일본의 오래된 시장 발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유적이기도 하다.
‘Old Hakone Road’라고 씌여있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왼쪽에 보이는 산은 후지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국도이자 일본의 1번 국도인 이 도로의 역사는 에도시대 토쿠가와 이에야쓰 (1543–1616)가 옛 수도인 쿄토와 새 수도인 에도(도쿄)를 잇는 도로의 건설 시행을 명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에 반해 조선말기까지 한국에서는 지방 반란이나 민란 확산을 우려하여, 또 (오늘날의 북한처럼) 인적 물적 교류를 제한하기 위해 동서 남북에서 서울로 가는 그 어떤 주요 도로도 공식적으로 없었다. 조선 후기 박지원과 박제가는 수레도 사실상 다니지 못했던 당시 조선의 이러한 후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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