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이 벌써 한 달이 지나고 둘째 달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지난 1월 한 달 동안 난 한선재단에서 역사교육의 정치 중립성 확보를 주제로 발표를 했고, 일본 여행을 통해 휴식을 취했다. 공부는 (여행을 하면서 짬짬이 하려고는 했지만) 많이 하지 못했던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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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재단 (한반도 선진화재단) 에서 세미나가 끝나고 홍후조 교수를 비롯한 참석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헤어진 후 충무로 역에서 전철을 타고 명동 역으로 갔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군밤이 갑자기 먹고 싶었는데 명동에 가면 길거리에서 파는 군밤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군밤 외에도 상권이 되살아난 명동 거리에는 다양한 먹거리들을 파는 길거리 상인들이 열심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명동 밤 거리의 인파 속을 걸으며 군밤을 먹으면서 이상하게도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 여행
일본에 가면 나는 주로 많이 이동하지 않는 편이다. 가부키를 관람하거나, 절이나 공원을 찾아가 산책을 즐긴다. 오래된 절이나 옛날 전통식 정원에는 말차 (matcha)를 파는 전통 찻집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그런 찻집에서 말차를 마시는 걸 즐긴다. 요즘에는 일본 젊은 사람 중에도 가부키나 노를 관람하거나 말차를 마시는 사람은 찾기 드물다. 그래서 자연히 일본 여행을 하다보면 내가 노인 취향의 여행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다. 단지 내가 역사교사여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본의 모습은 사실 지금의 일본이 아닌, 데즈카 오사무 감독의 우주소년 아톰 (鉄腕アトム)이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동경 이야기 (東京物語) 등에서 특징적으로 볼 수있는 전후 일본 사회의 정서와 문화이다. 일본의 1950-60년대는 과거의 아픔에 대한 상처를 간직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긍정과 전통에 대한 겸손함을 잘 간직한 시대였다. 무엇보다 건전한 희망이 사회적으로 분출된 시대였고, 이는 내가 한국의 1970-80년대를 좋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흔히 일본의 전성시대로 80년대-90년대 초반까지의 버블 경제 시대를 떠올리지만, 일본 현대사의 실질적 전성기는 50-60년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시기에 복구된 (전쟁으로 무너졌던) 사회경제적 토대는 이후 일본 사회문화의 부흥을 천천히 도래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60년대 중반부터 방향을 제대로 잡고 87년 이전까지 열심히 건설한 사회경제적 토대가 2000년대에 와서 지하철역 마다 에스컬레이터를 세우는 사치와, 급기야 무상교육과 무상급식을 제공하는 포퓰리스트 정책까지도 가능하게 해준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역사에서 보면 어느 사회나 열심히 일한 세대가 따로 있고, 편안히 그 과실을 따먹는 세대가 따로 있는데, 한국 현대사만큼 극명하게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와 비교하면 일본은 50-60년대 이후에도 근면과 자조, 협동 (이 전통적 쇼와시대 일본의 가치를 채택한 것이 박정희와 군사정권의 새마을 운동이었다)의 사회적 전통이 한국 처럼 완전히 끊기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 여러모로 한국은 87년 체제 이후 사회의 정신 수준이 타락하고 오만해지고 사치스러워졌는데, 이는 '왜색을 지우기' 위해 노력한 아이러니한 결과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수록, 내가 왜 이승만 보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는지를 나 자신 스스로 이해하게 된다. 내가 석사 논문을 쓰면서 분석했던 1958년 손창섭의 소설 <잉여인간>은 전후 1950-60 년대 대한민국의 사회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거기엔 아톰이나 노리코 (동경 이야기에 나오는 노부부의 막내 며느리)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눈물을 간직한 사회 분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잉여인간> 뿐 아니라 <오발탄>과 <자유부인>으로 대표되는, 무질서와 황량함, 퇴폐가 오히려 그 시대의 주된 정서에 가까왔다. 서만기(<잉여인간>의 주인공 치과의사)는 그래서 아톰보다도, 노리코 보다도 더 비참한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극심한 반일주의자였다. 그의 반일주의 정책은 사실 6.25 전쟁을 초래한 배경이기도 했는데, 미국이 원했던 한국-일본-미국의 연합 전선을 이승만 스스로 반일을 명분으로 걷어차 버렸기 때문이고, 에치슨 선언도 결국 그러한 동아시아 국제정치적 배경 속에서 초래되었던 측면이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해방 이후 건국된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시도했듯 반일을 바탕으로 미국적 자유주의적 시스템을 흉내내는 시도로는 도저히 사회 경제적 토대 구축은 커녕 전후 복구도 어려웠다. 왜 일본식 군사 훈련을 받고 일본 쇼와 시대의 엘리트 정신을 내재화했던 박정희가 일본의 정신 문화를 모델로 한 '잘 살아보세'와 '하면 된다' 와 같은 (liberal 한 미국 문화에는 찾아볼 수 없는) 슬로건을 가지고 (일제 시대 1910-20년대 때와 같은) 경제 성장을 다시금 60-70년대에 재현시킬 수 있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더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성취하길 염원하지만,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웠고, 일본을 통해서 무엇을 더 배울 수 있는지를 현명하게 깨닫지 않으면, 김영삼 정부 이래로 계속 진행되어 온 대한민국의 사회문화적 저열화 현상을 치유하기 힘들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국인은 영미인들과는 전혀 다른 정서와 사고를 하는 사람들인데, 반일을 하다보니, 정확히 90년대 개방화 이후 중국 사회가 걸어온 길을 함께 답습하고 있는 꼴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식이 아닌) 영미식 시장 자본주의를 따라하면서 서양 근대사에서 발전시켜온 철학은 빠져 있고, 그 외형만 쫓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그 결과, 물질주의, 중금주의의 만연 속에 개인의 지적, 도덕적 노력이 점점 약화되어 가는 흐름 속에 있다.
역사적 시각이 없이 현실을 살아가기 바쁜 일반 대중, 특히 어리고 젊은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반세기 가량 어느 방향에서 어느 방향으로 변화되어 그 결과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감을 잡지 못한다. 나이 드신 노인 분들은 딱히 철학이 없어도 피부로 과거와 비교해 한국의 정신 수준이 황폐화 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척도가 바로 (특히 어린) 사람들이 쓰는 언어의 수준일 것이다.
결국 이번에도 일본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그냥 편하게 하려고 했으나 또 한국과 일본의 역사 이야기로 흘러가버렸다. 한국사나 일본사 전공도 아닌, 19세기 영국 의료사를 공부했는데, 왜 생각은 늘 이런 식으로만 흘러가는지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아마도 영국사를 공부하고 나서 오히려 더 (역사교사를 처음 시작하던 과거에 비해) 한국사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 까닭이 큰 것같다.
내 지론은 간단하다. 한국사는 민족주의를 걷어내고 나면 비로소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참고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는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괴담 (怪談)>이다. 1964년 영화지만 영화 속의 스토리와 배경은 대부분 일본 중세와 에도 시대를 그리고 있다. 제목과 달리 하나도 무섭지 않은 영화이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스토리나 극 중 인물이 아니라 딱 한 가지, 미학적으로 너무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이 영화의 미장센은 60년 뒤의 세상을 살고 있는 옆 나라 국민인 나의 취향에 잘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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