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패스는 전체주의 사회의 올가미
숨쉬기 기본 권리 침해 방관한 결과
며칠 전 소아, 청소년의 백신패스 정책이 사법부의 제지를 당하게 된 후 백신패스 정책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더욱 더 거세지고 있다. 재판정에서 피고가 된 질병청은 백신패스 정책의 목적이 미접종자 보호라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예상했던 일이다. 재판을 바라보았던 사람들 중에는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코로나 종식’도 아니고, ‘방역 체제 부담 완화’도 아닌, 뜬금 없이 ‘미접종자 보호’라니..
마치 공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음산하다. ‘너는 이제 어디든 갈 수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내가 주는 이 주사를 맞기 전까지는 난 널 놔주지 않을거야’ 라고 무표정으로 얘기하는 호러 무비의 사이코패스 살인자를 보는 듯하다.
‘보호’라는 개념은 보호를 받고자 하는 사람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보호를 거부하는 데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더도 덜도 아닌, 전체주의 정치사상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자본가들의 착취로부터 보호하겠다, 경제공황의 위기로부터 보호하겠다,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 20세기 역사가 보여주듯 정치권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해 나가기 위한 명분으로 보호를 들먹이지 않았던 적은 없다.
모든 전체주의 정권들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불의로부터, 위협으로부터 자국 국민들을 보호해주겠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예외는 없다. 세상에 정치가 선하지 않은 목적을 명분으로 내세운 적이 있었던가? 제국주의조차도 그 명분은 정의로웠다.
단지, 누군가의 정의는 다른 누군가에겐 위협이 된다. 이 역시 언제나 예외가 없다. 애당초 정의(justice)를 ‘강요’하는 순간 모든 불행은 예고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왜 자신의 신념을, 자신의 정의를 타인에게 강요하는가.
최근에 백신패스 정책에서 미접종자를 차별하는 조치들을 바라보며 이제서야 사람들은 어떻게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전체주의 방향으로 국가가, 사회가 흘러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의아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정말 이는 특정 배후 세력이 한국을 통제하고자 하는 검은 음모를 드러내고 있는 결과일까? 아니면, 코로나 사태를 장기 집권을 위한 기회로 삼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 권력 집단의 의도가 점점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방향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이런 사회적 상황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과 관계되어 있다. 보호를 받고는 싶고, 그 대가를 지불하긴 싫어하는 논리가 그 근본에 있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건강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책임져 줘야 한다고, 국가가 개인의 교육을 책임져 줘야 한다고 부르짓는 사람들은 그 이면을 보지 못한다. 국가의 모든 보호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제한을 가하는 것을 동반한다는 기본 사실을 못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쉽게 비유하자면 쥐덫에 놓인 치즈만 바라보고 치즈를 먹으려고 달려드는 쥐의 모습과 다름없다. 그 쥐는 필연적으로 쥐덫이라는 전체주의의 올가미에 걸려든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모순된, 성스럽지 못한, 추악한 본능과 이성적이고, 성스럽고, 고결한 본능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그 치즈를 먹는 순간, 그 인간의 총체적 인격성은 결국 분리되고 자아의 욕구 중 반쪽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20세기 히틀러의 전체주의나 스탈린의 공포 정치 등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그러한 독재자들을 뭔가 사악한 욕망에 휩쓸려 사회를 장악하고자 한 괴물이나 악마로 취급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미친’ 독재자가 다시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웃는 얼굴로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를 얘기하는 정치인들에 열광하고 안심해 한다.
천만에.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김정은도 그렇듯이, 독재자는 결코 미친 자들이 아니며, 결코 악한 인간도 아니다. 그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 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들 눈에 가장 활용하기 쉬운 수단을 활용하고자 할 뿐이다.
가장 활용하기 쉬운 수단은 곧 정치적 공세에 가장 취약한 인간 본성 중의 한 기질이다. 바로 인간에 내재한 편하고자 하는, 보호 받고자 하는, 위로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러한 욕구를 실현하고 싶다면 돈을 주고 사면 된다. 경제적 시장의 영역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정치 시장에서는 정치가들은 돈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기본적 행복 추구권을 들먹이며 돈 따위가 이에 장애가 되어선 안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좌지우지 하는 돈의 액수는 개인들 사이에 떡볶이나 햄버거, 자동차나 핸드폰 몇개를 팔고 사는 거래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이다.
사람들은 사실은 알고 있다. 선별 검사소에서 PCR테스트를 무료로 받고, 백신 접종을 무료로 받지만, 그건 결코 공짜가 아님을. 정치인들이 이것을 해주겠다, 저것을 해주겠다, 마치 자기 돈 쓰듯 쉽게 사회적 목적을 정치적 명분으로 내세우며 결정하지만, 재난지원금과 함께 코로나 사태는 이미 천문학적 경제적 자원을 소모시켜 버렸다.
코로나 사태 이래로 정부가 취해온 온갖 정책들을 바라보면 거의 하늘에서 돈 비가 내리듯 물 쓰듯 예산을 써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어떤 국민도 심각하게 이 사태의 문제를 직시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모두들 더 지원해달라고 아우성이다. 모두들 더 보호해 달라고, 보호가 왜 이렇게 미덥지 못하냐고, 더 확실하게 보호해 달라고, 지원이 왜 이리 미덥지 못하냐고, 더 확실하게 지원해주고 ‘정부가 더욱더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라고’ 주문한다. 아주 익숙한 주문이다.
애당초 모든 독재, 모든 전체주의는 그 사회의 다수가 원해서 등장한다. 외계인 집단이나 사이코 패스가 나타나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독재 사회가 이루어졌다면, 전체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면 그 주범은 언제나 그 사회 대중의 집단적 욕망이다. 이 명백한 사실을 사회는, 그리고 대중은 늘 부정한다. 그리고 그 화살을 독재자에게, 권력자에게, 음모적 배후세력에게 날린다.
K방역이란 무엇을 가리키나. 그 본질은 고작 감기 따위에 걸리지 않겠다고 전 사회가 반쯤 이성을 상실하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백신을 맞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외국에서도 그랬지만, 한국 정치에서도 여당이든 야당이든 가리지 않고 ‘마스크를 쓰자! 백신을 맞자!’를 기치로 내걸며 지금껏 달려왔다. 물론 여기엔 정말 중요한 물음이 빠져 있었다. ‘왜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 왜 백신을 맞아야 하는지’라는 근본 질문에는 사회 전체가 관심조차 없었다.
의학과 위생의 수준은 20세기 내내 발달해왔으므로 묻고 따질 필요 없이 보건 전문가의 말을 따르면 된다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살아 온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 내부에도 애초부터 논쟁이 존재해왔다. 공포에 질린, 그리고 단순 사고에 젖어 생각하기 싫어하는 대중에게 그 어떤 정치가도 그 어떤 언론도 감히 논쟁적인 의견을 전달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코로나는 알려진 것처럼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병원에서 사망 이전이든 사망 이후이든 코로나 검사를 통해 소위 ‘코로나 사망’으로 통계가 잡힌 사례들은 그 절대다수가 ‘코로나로 인해 죽은(die of corona)’ 경우라기 보다 ‘코로나와 함께 죽은(die with corona)’ 경우였다.
이는 백신 접종 후 사망한 사람들에 대해 질병관리청이 보여준 이중적인 태도를 통해 가히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경우는 정말 어떻게든 어떤 수단을 써서든 백신과 사망 사이의 인과성을 인정하는 것을 회피하고자 철저하게 보수적인 의학적 관점으로 접근했다. 이와 똑같은 병리해부학적 관점으로 코로나와 사망 사이의 인과성을 판정하고자 했다면 폐 조직 검사 만으로도 부족하고 한 명 한 명 모든 코로나 사망자의 사인에 대해 몇주~몇개월간 사인 분석을 해서 정말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른 모든 원인보다 더 결정적인 사망 원인이었는지를 밝혔어야 했다.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코로나 사망률이 몇%가 된다는 식으로 이제껏 언론을 통해 물타기 해온 코로나 사망 통계들은 모두 ‘코로나는 매우 위험한 병, 죽을 병이다’라는 답을 정해 놓고 그것에 끼워 맞춘 통계 수치일 뿐이다.
이 브레이크 없는 열차의 시작은 작년 가을 마스크 강제 착용이었다. 생명체로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즉 자유롭게 숨 쉴 권리조차 제한 받기 시작한 후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긴 시간동안 이렇게까지 올 줄 몰랐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제대로 숨 쉴 권리도 인정이 안되는데 무슨 정치적 권리, 개인의 자유를 논하는가.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지 못한 한국사회는 너무나 당연한 방향으로 흘러왔을 뿐이다.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 기고 글
기사입력 2022-01-13 09:57:08
해당 기사 링크 (온라인):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49648
해당 기사 (지면, 2022년 1월 13일): https://www.skyedaily.com/data/skyn_pdf/2022/20220113/web/viewer2.html?file=20220113-31.pdf
위의 포스터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건치)'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었다. (2020.03.12)
이 정도의 이성을 지금의 한국 사회에 기대하는 것은 너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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