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 속에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크게 두가지 특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중 하나는 집단 감성에 너무도 취약하게 휘둘리는 사회의 모습이다. 사회적 희생양 만들기는 그 와중에 어김없이 나타난다. 집단 여론을 앞세운 정부와 이들 편에 선 정치인들을 상대로 신천지의 교주가 사태의 확산 와중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은 명예라는 가치가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어떻게 다루어 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다수를 자기 편으로 한 정치적 강자에 비해 그 반대편의 명예가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는 모습은 어느 사회에서도 나타나지만, 한국사회는 매우 잔인하게 그 약자를 유린하는 편이다. 명예와 같은 애매모호한 가치를 개인이나 기관이 법정에서 즐겨 (심지어 형사적으로) 다투며, 다분히 명예 훼손 고소가 한국 사회에선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기 보다 약자를 강자가 입막음하는 명분으로 더 잘 활용된다.
물론 신천지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라고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보건학이나 역학조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지난달 신천지라는 특정 모집단에서 초래된 상대적으로 높은 검사 비율은 전국의 확진자 통계수치에 있어 심각한 불균형 및 착시 현상을 초래했으리라 합리적으로 의심해볼 수 있다. 가령 지난달 신천지 신도들을 제외한 다른 한국인들은 자신의 주소지, 종교, 위생 상태 등을 이유로 강제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테스트 받지는 않았다. 무증상 감염으로 알려진 코로나 19라 해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증상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굳이 상당한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코로나 바이러스 테스트를 받으러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신천지가 보건당국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기사들은 인터넷에 난무했다. 글쎄, 비신천지인들은 모두 잘 협조했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협조’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가에 따라서 그 비판의 논조는 사실상 다분히 주관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과 관련하여 그 명예가 오히려 잘 보호된 집단은 중국인들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중국 입국을 의도적으로 금지하지 않았던 정부의 결정은 정치적 고려였다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다. 중국인이 계속적으로 입국해온 상황에서 감염자의 능동적 자기 검진을 그들 모두에게 내국인과 같은 수준으로 기대하는 것은 상당히 이상주의적 접근이다. 또한, 중국인은 한국 사회에서 약자일 수는 있겠지만 중국은 정치적으로 한국에게 약자가 아니다. 신천지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비신천지 한국인이 손해를 감수해야할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중국의 정치적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한국이 손해를 감수해야할 이유는 없다. 이는 오히려 일부 진영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중국인에 대한 배타적 혐오를 초래할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볼 수 있는 두번째 특징적인 모습은 사회적으로 환원론적 접근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개인은 사태가 심각할 수록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지금껏 간과되어온, 우리가 함께 숨쉬는 ‘공기’와 관련하여 모두가 불편해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한국사회에 제기하고 있다. 한국인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은 도저히 건강하게 살기 힘든 상황으로 내몰려 왔건만, 이번 겨울과 봄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미세먼지는 이미 저편으로 사라진 듯하다. 사실 중국에서 연간 미세먼지로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지금까지 사망한 사람들 숫자보다 적지 않을 것이다. 이미 2013년에 Lancet의 한 논문에서 그해 PM 2.5수준 미세입자 노출로 인한 중국인 유아사망자의 수를 916,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미세먼지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한가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건강에 대한 전체론적 (holistic) 시각보다 질병에 대한 환원론적 (reductionist) 시각에 너무나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자연과 인간 몸 간의 전체적인 조화로서 건강을 생각하기 보다 위생을 따로 떼어 걱정하기 바쁘다. 어느 가전제품 광고에서 옷을 ‘무균’ 상태로 만들어드린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왜 인간이 미생물 전체와 전쟁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병균’이라고 부르는 미생물들도 (면역 기능이 떨어진 인간의 체내 점막과 같은) 적절한 환경에 안착해서 숙주를 ‘감염’시킬 수 있으려면 험난한 여정을 겪어야 한다. (야외 벌판 보다는) 아마도 밀폐된 공간에서 부유하는 편이 숙주 접촉 확률이 높을 것이다. 집 안에 들어온 벌레를 죽일 수도 있지만 그냥 창문 밖으로 나가게 해주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부 환경 속 공기가 편안하게 숨쉴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다면 창문이나 문을 열어 환기를 시도하는 것이 바이러스 감염을 줄이는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에선, 사회적으로 자연 바람과 환기에 대한 강조 보다 거의 전적으로 손소독제와 마스크 사용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봐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
서양의 전통적인 hygiene(위생) 관념의 핵심은 개인이 자신의 생활과 환경에 대한 관리를 통해서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의 몸에 깃든 자연치유력을 높이는 데에 있었다. 가령 전체론적 의학이론이 나름 번성했던 19세기 중반까지도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처방했던 가장 핵심적인 위생 조치 (hygienic regimen) 중 하나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하는 산책이었다. 이는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시대 사조도 있었지만, 전통적인 위생 관념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반면 서울은 더이상 그 도시에 살고 있는 개인에게는 ‘바람이 불지 않는 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 물론 바람은 불긴 하지만, 사람들은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기지도 고마워하지도 않는, 아니 귀찮아 하고 더 나아가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켜왔다. 미세먼지는 매년 심해져 왔지만, 차와 도로는 갈수록 더 늘어나고 숲은 사라지고 있으며, 도저히 건강해질 수가 없는 상황으로 도시 환경은 흘러가는데, 사람들은 혈당 수치와 칼로리 섭취량 만 들여다보며 건강을 체크하고 있다.
갈수록 포퓰리즘화 되어가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력을 기대하기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부유층 증세를 지지하며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자 외치는 사람들도 정작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유류세나 도로세를 올리는 데에는 찬성할지 의문이다. 숲을 조성하기 위해 도로를 줄이지는 못할 망정, 시멘트 바닥에 나무 화분 가져다 놓고 공원 조성이라고 우기는 지자체들의 한심한 녹지정책은 답답함을 넘어 숨막히게 한다. 녹색 페인트를 바른다고 녹지가 되지 않는다.
위생은 건강을 위해 존재한다. 말할 것도 없이,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방역 조치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멸균, 소독을 강조하는 환원론적 조치뿐 아니라 자연 속에서 건강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가고 이를 통해 개인들의 면역력을 보다 높여 갈 수 있는 방향으로도 사회적 각성이 일어나길 빌어본다.
자유기업원 <시민논객> 기고
해당 기사 링크: https://www.cfe.org/20200408_22542
등록: 202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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