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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코로나바이러스가 미세먼지보다 위험한가


The World Air Quality Index at 10 pm, 16 November 2020 (https://aqicn.org)


한국사회 기괴한 집단논리 보여주는 마스크 강제 착용


마스크로 입을 가리는 것과 마스크로 입과 코까지 가리도록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것이 왜 이렇게 다른 문제인지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짧은 질문에 대해 사람들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는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기괴한 집단 논리와 혼탁한 현실 인식이 숨어 있다.

좀 길지만 이와 연관된 역사학적, 의학적 논리를 적은 나의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 간략히 요약을 하자면, 마스크를 코까지 강제로 가리는 정책의 도입에는 환경문제로서의 공기에 대한 무관심과 마스크에 대한 잘못된 인식, 그리고 개인의 가치에 대해 무감각한 집단주의적 사고가 맞물려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마스크 강제 착용은 드디어, 그리고 기어코 본격화되어 11월 13일부터 벌금을 동반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나에게 이 날은, 연구 논문 한 편과 함께 내가 공저자로 참여했던 의학과 환경의 역사를 주제로 한 새 책이 나온 날이었다.

이 책에서 19세기 영국의 위생과 의학의 관계를 다룬 내 논문의 마지막 문구는 묘하게도 위와 같은 정책이 아무렇지 않게 시행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바라보는 저자의 씁쓸한 감정을 담고 있다. 적당히 의역 하자면, 그 마지막 문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오늘날 환원론은 의학과 여타 과학 분야에 지배적인 시각이 되었으며, 자연 바람과 신선한 공기는 더이상 건강에 있어서 우리가 중요하게 신경 쓰는 가치가 아닌, 부차적인 존재이자 귀찮은 환경이 되었을 뿐이다.

손 씻기와 정기적 검진 등은 의사들에 의해 항상 강조되지만, 정작 건강을 위한 전통적 위생의 기본 철학은 평범한 많은 사람들의 일상과 오늘날의 독점화된 의학 시장 속에서 망각되어 버린 듯하다.

물론 위의 글은 서구의 고전적인 위생(hygiene) 개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이 고전 위생 개념의 핵심은 개인이 자신의 생활과 환경에 대한 관리를 통해서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의 몸에 깃든 면역 능력을 높이는 데에 있었다.



선명하게 대지에 드리워지는 구름 그림자 (near Leuchars station in Fife, Scotland, June 2015)


산책은 필수적인 삶의 요소이자 가장 핵심적인 위생 조치


가령 전체론적(holistic) 의학 이론이 나름 번성했던 19세기 중반까지도 유럽의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처방했던 가장 핵심적인 위생 조치(hygienic regimen) 중 하나는 야외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하는 산책 (walk in the fresh air)'이었다.

이 전통적인 위생 관념이 특히 18, 19세기 전 유럽에 유행했었던 시대적 배경은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에 있었다. 이는 문학이나 예술뿐만 아니라 의학 철학사(the history of medical philosophy)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지금도 영국에서 대부분의 서민들이 가족과 함께 기분 내는 방법은 자연으로 떠나는 것이다.

굳이 캠핑이 아니더라도 영국의 어느 타운이든 한 시간 거리 이내에 숲이 우거진 자연 속을 마음껏 거닐 수 있는 곳은 널려 있다. 조용한 숲 속을 산책하는 것을 필수적인 삶의 요소로 생각하는 유럽인들의 모습만큼 한국인의 삶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서울의 미세먼지 자욱한 공기 속에 지내는 지금은 예전 유학 시절의 영국인들이 crisp air라고 부르는 그 차갑고 건조하면서도 상쾌한 공기가 그립지만,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공기에 너무나 쉽게 익숙해진다. 서울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도시 풍경은 메케한 공기 속에 다들 차를 몰고 출퇴근하는 직장인들 모습이었다. 도로는 비행기 활주로 마냥 지나치게 넓고, 보행자 ‘따위’는 이 자동차 왕국처럼 보이는 서울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서울에서 보행자로 걸어 다니면서 어릴 적 읽었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에 나오는 도시 쥐, 아니 시골 쥐의 모습이 나와 오버랩 되는 느낌이 자주 들곤 했다. 가까운 일본의 동경과 비교해도 서울의 보행자 신호등 대기 시간은 거의 두 배 가까이 긴 것처럼 느껴진다. 한마디로 서울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개인에게는 ‘바람이 불지 않는 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기지도 고마워하지도 않는, 아니 아예 차단된 채 느낄 수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자동차 바깥, 창문 바깥의 공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에 더 이상 신경 쓰는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미세먼지는 매년 심해져 왔지만 차와 도로는 갈수록 더 늘어나고 숲은 사라지고 있으며, 도저히 건강해질 수가 없는 상황으로 도시 환경은 흘러가는데 사람들은 혈당 수치와 칼로리 섭취량만 들여다보며 살고 있다.

갈수록 포퓰리즘화 되어가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력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부유층 증세를 지지하며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자 외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유류세나 도로세, 자동차세를 올리는 데에는 찬성할지 의문이다.


Near St Andrews in Fife, Scotland (July 2016)


코로나바이러스가 미세먼지보다 더 위험한가


숲을 조성하기 위해 도로를 줄이는 도로 다이어트 정책은 고사하고, 벽돌 바닥에 나무 화분 몇 개 가져다 놓고 공원 조성이라고 우기는 지자체들의 한심한 녹지 정책은 답답함을 넘어 숨막히게 한다. 서울의 수많은 빌라 건물 옥상에 발라진 녹색 페인트는 역설적으로 녹지로부터 멀어져 가는 서울 시민들의 삶을 선명하게 반영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코로나 바이러스를 명분으로 한 마스크 강제 착용 정책은 위의 모든 기괴한 한국의 현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결과의 최종 결정판이다. 내 눈에는 너무나 신기하게도 올해 한국 사회에 여론화되지 않았던 중요한 물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미세먼지보다 더 위험한가이다.

사실 중국에서 연간 미세먼지로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는 올해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들 숫자보다 결코 적지 않다. 가령 이미 2013년에 Lancet의 한 논문에서 그해 PM 2.5수준 미세입자 노출로 인한 중국인 유아 사망자의 수를 916,000명으로 계산했었다.

며칠 전 compulsory mask wearing라는 키워드로 구글 검색을 했다. 구글 알고리즘이 검색한 수많은 글 중 첫 페이지 두 번째로 올라온 글은 인도 타임즈에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 보건학 명예교수가 지난 달 기고한 글이었다. 한국의 코로나 방역 정책과 관련해 내가 올해 초부터 해왔던 생각과 놀랍게 일치해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점점 더 집단주의적 기조를 강하게 띠기 시작한 한국 방역에 날카로운 비판 쟁점이 될 내용을 다수 포함한 글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는 정책은 보건학적으로 아직 논쟁적인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었고, 실제 감염은 대부분 실내 공간에서 일정 시간 이상 감염자와 함께 (마스크를 끼던 안 끼던) 시간을 보내는 경우였음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었다.

또한 다른 많은 논문에서도 지적하듯, 마스크 착용 유익은 착용자 자신을 위한 예방에는 별 효과가 없고 (매우 고위험군은 예외), 일반적으로 말하거나 기침할 때 비말이 가까이 있는 상대에게 튀지 않도록 하는 데 있음을 얘기하였다.인상적인 부분은 마스크가 오히려 바이러스를 코와 마스크 사이 협소한 공간에 (배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래 붙잡아 두게 되는 ‘trap the virus’ 효과를 지적한 것이었는데,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히 나오는 결론이다.

마스크 강제착용, 헌법에 입각해서도 개인건강권 훼손해


나 역시 예전 구강외과 인턴 시절 수술실에 들어갈 때면 레지던트 선배로부터 마스크에 대한 엄격한 착용 지침 및 수술실에서 나오는 순간 즉시 폐기 등의 매뉴얼을 열심히 따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매일, 그것도 거의 매시간,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자신들이 착용하는 마스크가 자신들의 호흡에 항균 역할을 해주리라 믿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믿음이다.

애당초 무균 호흡을 지향하는 듯한 그런 어리석은 목적 자체도 불편만을 초래하는 미신적 신념에 더 가깝다. 일반인들이 쓰는 마스크 안에 무슨 산소 탱크가 들어 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우주인 헬멧도 아닌 이상, 자신이 흡입하는 산소는 결국 마스크 밖의 외부 공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망각한다.

애당초 자신들이 흡입하는 공기 자체에 대한 무관심이 초래한 모습이다. 즉 일반인들의 마스크 착용의 본래 의미는 타인에 대한 배려 차원이지 자신을 감염으로부터 지키는 예방의학적 목적의 행동이 될 순 없다.

원래부터 기침을 할 때 그다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개인공간(personal space) 개념에 대한 의식도 없고, 줄을 설 때나 물건을 계산할 때 멀찍이 떨어져서 기다리는 기본 에티켓도 없는 한국 사회에서 코까지 가리는 마스크 정책이란, 치과의사로서 비유하자면 칫솔질하는데 치실이나 치간 칫솔은 안 쓰면서 양치액을 입 속에 몇 번 가글한 후에 이제 개운해졌으니 구강청결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게 어리석은 모습이다.

어떤 정책이든 그것이 의도하는 목적이 있는 반면 그에 부수되는 비용이 초래된다. 이 비용에는 가시적인 경제적 비용뿐 아니라 쉽게 정량화할 수 없는, 개인들의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비용이 포함된다. 집단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부 하의 여러 정책들은 흔히 후자의 측면을 너무나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분명히 얘기하자면, 마스크로 입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데에 나도 동의하지만, 마스크를 코까지 의무적으로 가리게 하는 정책은 헌법적 정신에 입각해서도 개인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훼손할 여지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내가 숨 쉬는 공기를 깨끗하게 만드는데 조금도 관심 없어 보이는 정부가 합리적 근거도 없이 개인이 코로 공기를 들이쉬는 행위의 기본권마저 방해하고 간섭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진: from <제3의길>



제3의길 기고: 제3의길 117호 [2020년 11월 15일] 게재 기사 해당 기사 링크: http://road3.kr/?p=39085&cat=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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