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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학력시장을 왜곡시켜온 입시 이상론자들





수능대박 기원 리본(사진=에듀인뉴스DB)



1990년대 이래 지금까지 입시제도의 큰 변화 추세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국가가 시행하는 일률적인 대입 시험의 비중 축소와 대학별 다양한 수시 전형의 확대. 전자와 후자는 시소 게임처럼 반비례 관계이므로 분리해서 생각하기 힘들다. 


학생의 학업 실력이 뛰어난 만큼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 대입에 있어 신뢰도의 핵심이라면, 이러한 추세는 신뢰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타당도에 초점을 맞춘 추세이다.


즉, 대학이 원하는 가치를 가진 학생을 대학들이 각자 찾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입시제도다. 


가령 현행 입시 체계에서 내신 전형(학생부 교과전형)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시 전형들(학생부 비교과 내용, 면접 구술 시험, 자기소개서 등)은 신뢰도를 감소시키는 대신 대학입시의 타당도 제고를 위해 채택된 전형 요소들이다. 


대학 입장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반기겠지만 고등학생의 시각으로 보면 입시에 있어서 불확실성이 크게 증폭되는 셈이다.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을 결판 낸다는 오명을 받아온 국가 주도 대입시험, 즉 정시 전형에 대한 비판은 늘 있어왔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내신성적(학생부 교과성적)은 대학입시의 수많은 전형 요소들 중 국가 시험 다음으로 신뢰도가 높은 전형요소로서 국가 시험을 보완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는 담당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간 존재하는 격차가 상존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대학 입장에서 볼 때) 신뢰도는 제한적이다. 


내신 전형의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이 선호하는 명품 대학들(주로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들)이 그다지 내신 전형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들 대학의 입장에선 어차피 지원자들의 내신 성적이 전반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이는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이들 대학에서 비중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종은 정시 전형이나 내신 전형과 비교해 '학생의 입장에서 볼 때' 떨어질지 붙을지 예측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즉, 1990년대 이래 지속되어온 수시 전형의 확대가 지금까지 한국의 고등학생 전체 집단에 대해 미친 영향과 결과에 대해 말해본다면, 학생들은 덜 열심히 공부해도 (자신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경쟁자가 떨어지는)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이유와 명분을 가지게 된 셈이다. 


그 반대의 (더 열심히 공부해도 덜 열심히 공부한 경쟁자에게 밀려 탈락하는) 경우 역시 같은 비율로 증가해온 셈이기도 하다.


즉, 지금까지 30여년간 국가시험 의존도를 계속 줄이고 대학에 자유로운 선발권을 보다 많이 부여해온 결과, 입시에 있어서의 신뢰도는 충분히 저하된 셈이다. 



사진: from 에듀인뉴스

최근 다시 수시 비율을 줄이려는 정책을 놓고 많은 언론에선 ‘수시전형은 강남권 학생에게 불리하고 일반고 재학생, 지방 학생들에게 유리한 전형이다’고 평가해왔다. 


하지만, 그러한 언급 자체는 통계적으로 그럴 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평등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에 편향된 자신들의 시각을 보여줄 뿐, 그들의 주장은 결코 확대된 수시와 학종을 지지하는 논리적 근거가 되긴 힘들다. 


학생 개인의 입장에서 입시는 더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그보다 덜 노력한 (자신이 원하는 대학의 학과를 똑같이 지원한) 경쟁자보다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공정’한 것이다. 


그 학생이 지방에 산다고 해서 일반고에 다닌다고 해서 유리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이러한 포퓰리즘적 집단 감성을 바탕으로 정책을 평가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한다. 


현상의 본질은 강남권에 학생들, 그리고 특목고나 자사고 학생들이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음을 통계가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이들 학생들이 더 극심한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를 국가가 해소하겠다는 발상은 또 다른 문제이며, 더 나아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성적을 높이려는, 즉 자신의 가치에 부지런히 투자하려는 이들 학생들의 의도를 국가가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정책을 통해 (경쟁이 덜 한 학교의) 다른 학생들과의 ‘결과적 평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입시, 즉 학력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철학적 근거가 빈약하며 현실적으로도 성공하기 힘들다.


경제학적으로 시장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비용(social cost)를 동반하지만, 늘 정부는 사회적 정의나 대의명분을 앞세우며 이 비용을 외면 혹은 부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 부작용, 즉 비용은 언제나 목소리 내지 않고 경쟁의 룰에 충실히 따라서 자신의 가치에 투자하고 부지런히 미래를 준비해 나가가고자 하는 개인들에게 전가된다.


큰 목소리로 정의를 내세우는 집단들의 주장은 그런 조용하고 힘없는 개인들의 희망과 계획에 종종 상치되기도 하는 것이 사회 현상의 속성이다. 


그러한 무논리와 집단 감성에 편승한 언론 보도의 보다 심각한 점은 그들의 시각이 입시제도와 관련한 한국사회의 사회학적, 역사학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는 점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정부의 정책은 '입시지옥'으로 고통받는 학생들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정확히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해왔는데, 정부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부에 의한 수시 확대 정책, 즉 대학교가 요구하는 자질을 학생이 얼마나 갖추었는지를 모든 대학교가 제각각 자신들 나름대로 분석하여 학생의 가치를 평가하게 해주겠다는 것은, 노동시장에서 사용자가 구직자를 채용하기 위한 평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는 미국의 개인주의적 노동시장처럼 당사자 간 계약체결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진입 및 탈퇴 장벽이 낮은 경우에 매우 효율적인 체제다. 중앙통제식 배분에 비하면 경쟁을 통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훨씬 구매자에게도 판매자에게도 이익인 상황이다. 


문제는 과거시험과 문벌사회의 역사를 간직한, 학벌을 강하게 지향하는 한국사회의 대학 입학 체제에, 개인주의적 영미 노동시장의 철학인 쌍방 계약적 원리를 도입해옴으로써, 동아시아적 유교 현실과 영미식 자유주의 이론 사이의 충돌이 지금껏 발생되어 왔다는 점이다.



사진: from 에듀인뉴스


한국의 학력시장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구매자 보다는 판매자에게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구매자인 학생 입장에서는 대학들의 서열 구조가 여전히 건재하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A대학을 선택하거나 B대학을 '선택할 자유 (freedom of choice)'는 이론적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과 미국 등 지식 시장의 전통이 강하고, 비즈니스로서의 대학 역사가 긴, 치열한 경쟁을 거쳐 이미 세계적인 브랜드 가치를 보유한 대학들이 많은 나라의 학생들과는 한국의 학생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매우 다름을 의미한다.  


실제로 정부 역시 지금까지 대학에 학생 선발권을 완전히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듯, 정부는 각종 수시 전형과 정시 전형의 비율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끊임없이 대학 입시에 관여해왔다.


결국 시험성적과 대학 자율 선발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신뢰도를 ‘적당히’ 떨어뜨리는 대가로 대학도 ‘적당히’ 학생 선발 자율권을 행사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의 이런 저울질은 과연 누구와 누구 사이의 대립 속에 이루어진 것일까?


그 한쪽을 구성하는 주된 집단으로선 자율선발권을 당연히 행사하고픈 대학을 중심으로, 이들을 지지하는 (대개 영미식 교육학을 공부한) 입시 이상론자들과 수시 중심 입시체제가 가져온 사회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입시전문가들이 있을 것이다. 


반면 다른 한 쪽을 구성하는 주된 집단에는 교육에 대한 보수적인 혹은 현실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육은 전자가 대체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켜온 셈이며, 보수적이고 현실적인 후자의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억눌려 왔던 셈이다.


학교에서 절대 다수의 평범한 학생들은 사실상 학종 및 비교과 전형과 그다지 관련 없는 학교생활을 한다. 대부분은 수업시간에 공부하게 되는 학습량을 따라가기도 벅차하며, 수시로 준비해야 하는 수행평가도 버겁기만 하다. 


학생회장, 학급회장 또는 동아리 회장 등을 맡게 되는 소수의 학생 집단이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서 ‘인격적으로’ 우월한 학생도 아니지만, 그들이 얻은 ‘집단을 위해 봉사할 기회’가 그들에게 입시에 있어 혜택을 얻게 한다는 사실은 동시에 그런 기회를 놓친 다수의 학생에게는 학교 생활과 입시 양면에서 상실감을 증폭시킨다. 


학교생활기록부에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담임교사와 수업교사가 기록한다는 원칙도 그 기준과 범위, 관찰의 주관성과 모호함을 교육부의 세부지침들로 해소하기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상황은 교실 내부 학생 사이의 관계가 더 정치적이고 전략적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들며,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도 더 계산적이고 의존적이 될 가능성을 초래한다.


딱히 진학이나 입시에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교사로서의 내가 생각해볼 때, 도대체 어딜 봐서 수시 비교과 전형들이 학교 교육을 정상화시키는데 일조하며 교육학적으로 더 바람직한 전형이라는 건지 그 논리에 정말 수긍이 가기 힘들다.  


이렇듯 복잡한 현안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대중의 집단 감성과 목소리 큰 집단들의 명분론적 주장에 맞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원칙을 사회적으로 합의해 나갈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개인주의 역사교사로서 나의 시각은, 국가가 그리고 교사가 학력시장에 개입하면 할 수록 장기적으로 볼 때, 문제 (대학 서열화와 고교 교육의 입시 위주 파행)는 더 악화된다고 본다. 


입시제도는 간단하고(simple) 일관되어야 (consistent) 한다. 이를 통해 국가의 개입도 최소화시키고, 어차피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들의 다양한 입시전형을 준비해야 하는 학생 부담도 최소화시킬 수 있다.


정말 학생의 스트레스를 헤아린다면, 이 두 원칙만이라도 지켜지길 빈다.


대학 서열화와 입시 위주 교육 문제는 오직 한국 사회에 시장경제가 보다 발전하고 자본주의가 보다 성숙해질 때 자연히 해결될 문제이지, 절대로 입시제도 자체에 무슨 아름다운 명분과 이상을 담기 위해 이리저리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국가가 할 일은 규격화된 대학 입학 시험을 공정하게 운영하는 것이고, 고교 교사의 책무는 학생들의 내신을 공정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학생 개인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가치 투자하는 것이 입시 공부의 본질이므로 국가가 학생의 스트레스를 대신 걱정해주고 교사가 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이는 사적 자치를 바탕으로 하는 독립된 개인의 자율적 결정을 무시하는 것일 뿐이다. 


학생이 수업을 충실히 듣는 것과 학생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다. 전자를 지도하는 것은 학교교육의 진정한 의미이며, 후자의 본질은 명품 대학교 졸업장을 구매하고 싶은 학생들의 개인적인 욕망이다. 따라서 교사는 후자에 관여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교사가 후자의 과정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순간, 수시 제도의 공정성은 본질적으로 위협받을 뿐 아니라, 본의 아니게 학력시장의 불필요한 과열에 일조하게 되는 것이다. 









에듀인뉴스(EduinNews) 기고 해당 기사 링크: http://www.edu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53

승인: 2020.06.2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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